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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이듦연구소</title>
		<link>https://naidum.trendcube.co.kr</link>
		<description></description>
		
				<item>
			<title><![CDATA[중생(衆生), 그 중유(中有)적 존재들을 위하여 -&lt;티벳 사자의 서&gt;]]></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9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10/6700fa5ac02dd8773263.jpg" alt="" /></p>
<p> </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9px;"><strong>중생(衆生), 그 중유(中有)적 존재들을 위하여</strong></span></p>
<p style="text-align:center;"><strong>-티벳 사자의 서를 읽는 하나의 방법-</strong></p>
<p> </p>
<p> </p>
<p><span style="font-size:17px;"><b>1.티벳에는 뭔가가 있다</b></span></p>
<p> </p>
<p>공부는, 나에게 자기구원의 방법이었다. 인문학공동체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삶은, 나에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만일 아니라면? 안된다면? 음, 티벳으로 가야지....</p>
<p> </p>
<p>티벳! 그곳은 오랫동안 나에게 달라이 라마의 자비심, 조장(鳥葬)이라는 무상(無常), 삼보일배의 곡진한 기원 등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성과 속, 이승과 내세의 경계가 시나브로 섞이며, 동시에 영화 &lt;컵&gt;에서 보여지듯, 관용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다.</p>
<p> </p>
<p>&lt;컵&gt;의 한 장면, 월드컵에 진심인 젊은 스님들을 보면서 노스님이 묻는다. “전쟁이 난다고?” 주지 스님은 당황스럽다. "오잉? 전쟁이라뇨?"</p>
<p> </p>
<p> </p>
<p><span style="color:#0000ff;">노스님 : 두 나라가 공을 가지고 싸운다며?</span></p>
<p><span style="color:#0000ff;">주지 : 아! 예. 아마 자정쯤 시작할 겁니다.</span></p>
<p><span style="color:#0000ff;">노스님 : 싸우기엔 정말 이상한 시간이군. 근데 싸워서 이기면 뭘 얻는가?</span></p>
<p><span style="color:#0000ff;">주지 : 컵을 차지합니다.</span></p>
<p><span style="color:#0000ff;">노스님 : (찻잔에 물을 붓고) 컵이라...</span></p>
<p> </p>
<p>2009년에 달라이라마의 고향인 옛 티벳 암도지방 (지금은 중국 청해성)의 랑무스, 라블랑스 지역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천장터에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했고, 겔룩파 라마승들의 그 유명한 토론수업, 변경(辨經)을 직관하기도 했고, 곳곳에서 오체투지하는 순례객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어느날 초원으로 소풍 나온 스님들을 우연히 만나 찍은 사진 한 장, 까까머리 동자승과 내가 마주보고 웃고 있는 그 장면은 지금까지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려있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갈 거야. 하지만 여러 여건상 그 염원은 부질없는 것이 될 터이다. 대신 나는 &lt;티벳 사자의 서&gt;을 읽었다. 여기에서 티벳의 지혜 한자락이라도 길어올리고 싶다. 그런데 이 텍스트, 묘하다. 어떤 점에서는 대단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황당하다.</p>
<p> </p>
<p>칼 융은 &lt;티벳 사자의 서&gt;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lt;티벳 사자의 서&gt;에 등장하는 온갖 신들과 귀신들을 일종의 무의식으로, 단 프로이드처럼 개인적이며 트라우마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며 창조적인 역량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자아를 넘어 존재의 본성, 마음의 본성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온갖 상징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영적 이해력이 일천하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 모든 비의적 텍스트가 그러하듯. 일개 범부인 나는 약간 좌절한다.</p>
<p> </p>
<p>알려져 있는 것처럼 티벳은 7세기에 토번 왕조의 모습으로 세계사에 처음 등장한다. 인도불교가 쇠퇴하던 8세기 경 인도의 승려들은 대거 티벳으로 건너갔고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섞인 티벳불교(밀교 혹은 금강승金剛乘이라고도 불린다)를 탄생시킨다. 고대 티벳어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lt;티벳 사자의 서&gt; 역시 8세기 인도에서 티벳으로 넘어온 파드마 삼바바라는 고승에 의해 지어졌다. 그는 이 책을 쓴 후 은밀한 동굴 속에 감추어두고 600년 후에 발견되리라는 예언을 남겨놓았는데 실제 600년 후인 14세기에 깊은 산 동굴 속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책은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계속 전해지면서 마치 기독교 문화권에서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이 낭송되듯, 그렇게 티벳 내에서 일상적으로 읽혔다고 한다. 이후 1919년 영국인 윌터 에반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번역해 1927년에 지금의 이름 &lt;티벳 사자의 서 Tibetan Book of the Dead&gt;로 출판한다. 그리고 이 책은 19세말부터 시작된 서구 뉴에이지 흐름 속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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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span style="font-size:17px;"><b>2. ‘</b><b>바르도</b><b>’, </b><b>두 개의 </b><b>‘</b><b>이행</b><b>’</b></span></p>
<p> </p>
<p>이 책의 원제는 &lt;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gt;이다. ‘바르도’라는 용어는 좁은 맥락에서는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의 중간 상태, 더 넓은 맥락에서는 ‘이행’ 혹은 ‘틈’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퇴돌’은 듣는 것(Thö)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dol)라는 뜻이다. 사실 &lt;바르도 퇴돌&gt;에는 6개의 바르도가 나열되어 있다. 첫 번째는 “출생지의 바르도”, 두 번째는 “꿈 속의 바르도”, 세 번째는 “명상의 바르도”, 네 번째는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다섯 번째는 “존재의 근원의 바르도”, 여섯 번째는 “환생의 바르도”로서 원어로는 각각 키에나 바르도, 미람 바르도, 삼탄 바르도,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드파 바르도이다.</p>
<p> </p>
<p>따라서 이 책은 류시화의 말대로 “장례식 절차를 설명한 책이 아니며, 단순한 사후세계의 설명서가 아니다.” 그것은 생의 근본 진리를 설파하는 책으로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심오한 가르침”이다. 라마 고빈다(1898~1985) 역시 이 책은 죽음이나 가설적인 사후세계에 관한 종교적 사색을 넘어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이르는 열쇠”이며, “영적 자유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의 길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지침서이다.</p>
<p> </p>
<p>티벳불교의 모태신앙자도 아니고, 서구 뉴에이지 세대도 아닌 나 역시 이들을 따라 &lt;티벳 사자의 서&gt;를 ‘산 자를 위한 지침서’로, 즉 인간의 유한성에 대처하는 하나의 ‘포에지(시문학)’적 텍스트로 읽어나간다. 나의 독해방법은 바르도를 ‘이행’으로, 또 그것을 존재론적 층위의 이행과 윤리적 층위의 이행으로 이중적으로 겹쳐서 읽는 것이다. 존재론적 층위는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교대되고 있다는 사유이며, 윤리적 층위는 우리는 누구나 일체개고(一切皆苦)에서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고이다.</p>
<p> </p>
<p>우선 존재론적 이행과 관련하여, 사계절의 순환처럼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인도뿐 아니라 창조주를 가정하지 않는 모든 고대적 사유의 일반적 특징이다. 고대 중국의 &lt;역경&gt;은 이것과 관련된 가장 고전적이며 동시에 매우 탁월한 텍스트이다. 그 유명한 계사전 5장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爲道)”를 왕부지(王夫之)를 통해 해설하고 있는 프랑수아 줄리앙은 ‘운행’이라는 키워드로 역(易)의 존재론을 설명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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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font-size:15px;color:#0000ff;">“‘태초에’ 교대가 있었다. 호·흡, 주·야,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왕·래, 개·폐. 낮과 밤은 하늘의 호흡과 같으며 여름과 겨울은 낮과 밤의 리듬을 재연한다.(왕부지) 단지 그 차원이 다를 뿐 모든 현상은 영속적인 왕-복을 따른다. 이를테면, 수축-팽창, 신장-굴절.</span></p>
<p><span style="font-size:15px;color:#0000ff;">밤과 낮은 교대하며, 해가 지면 달이 뜬다. 그러나 하늘은 가시와 비가시의 끊임없는 운화 속에 여일하다. 왕부지의 언급대로 하나의 명징성으로서의 세계는 비록 비가시적일지라도 낮이든 밤이든 실재적이다....계절의 순환 역시 현동과 잠재의 연쇄에 다름 아니다... 드러남은 현동화이며, 사라짐은 잠재화이다. 밤이 온다고 해서 바깥 세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잠이 든다고 해서 개인의 정신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span></p>
<p><span style="font-size:15px;color:#0000ff;">교대와 작용, 보다 구체적으로 교대에 의한 작용의 상징들. 이는 왕부지의 독서를 통해 더욱 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의 구체적인 성찰 대상은 불투명함 속에 열릴 줄 모르는 ‘벽’이 아니며, 닫힐 줄 모르고 언제나 열려있는 벽 속의 ‘구멍’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때로는 열려있고 때로는 닫혀있는, 즉 열려있기에 닫힐 수 있고 닫혀있기에 열릴 수 있는 문(門)이다. 열려있든 닫혀있든 문이란 늘 제 역할을 다한다. <b>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은 수시로 필요하며</b><b>, </b><b>변화의 조건이 되는 상호성으로 인해 결코 다함이 없다</b>.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흐름의 가능성이 바로 운행의 요체인 ‘도’를 형성하리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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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존재의 이행성를 표현하는 불교의 개념은 부파불교의 ‘사유(四有)’와 또 그것의 근거가 되는 초기 경전의 ‘십이연기(十二緣起)’ 아닐까? 알다시피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행(行)-식(識)-명색(明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老)/사(死)로 이어지는 십이연기는 모든 존재가 실체가 아니라 연기적 과정의 한 매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연기 과정을 전생의 업으로 이생의 삶이 출현하고 이생에서 또 다시 짓는 업으로 내생의 삶이 이어진다는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존재의 이행을 일종의 (인과)법칙으로 설명한다.</p>
<p> </p>
<p>이를 부파불교는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와 삶을 영위하는 기간인 본유(本有), 삶을 마치는 순간인 사유(死有), 그리고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라는 존재의 네 가지 형식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이 티벳밀교에 와서 다시 6개의 바르도로 설명되고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p>
<p> </p>
<p>정리해서 말하자면 &lt;티벳 사자의 서&gt;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층위의 이행(바르도)은 다른 모든 지혜의 텍스트처럼 삶도 과정이고 죽음도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표현대로 그것을 문이라고 한다면 삶이 입구이고 죽음이 출구일수도 있고, 반대로 죽음이 입구이고 삶이 출구일 수도 있다. 장자는 이것을 ‘도추(道樞)’라는 개념을 통해 삶과 죽음 그 어느 하나에도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존재론적으로 정말 다른 게 아니다.</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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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span style="font-size:17px;"><b>3. 윤회 혹은 환생이라는 윤리적 아젠다</b></span></p>
<p> </p>
<p>그러나 &lt;티벳 사자의 서&gt;의 매력은 존재론적 이행이 아니라 윤리적 차원의 이행에 관한 매우 풍부하고 상징적인 서사에 있을지도 모른다. ‘중유(中有)’에 속하는 치카이 바르도와 시드파 바르도 단계에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 갈 것인지 다시 육도윤회(六道輪廻)로 떨어질 것인지가 명료하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읽은 세가지 바르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p>
<p> </p>
<p>가장 먼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라고 불리는 치카이 바르도가 있다. 대개 외호흡이 멈춘 후(생물학적 죽음) 3일반에서 4일 사이를 이르며, 몸을 이루고 있었던 지수화풍공, 5대가 분해되고 있으나 육체는 아직 부패하지는 않고 있다. 의식은 처음에는 혼미하다가 갑자기 깨어난다. 업력도 중음의 환영도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청정한 빛이나 두 번째 청정한 빛을 깨달아 바로 해탈할 수 있다.</p>
<p> </p>
<p>치카이 바르도에서 바로 깨달아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하면 이제 바르도체는 14일간의 초에니 바르도 단계에 머무르게 된다. 육체는 부패하고 의식 상태는 맑고 강렬한 감각기관의 지각이 있다. 하지만 업력이 작동하면서 처음 7일간의 평화의 신, 다음 7일간은 분노의 신이 총 112명 출동한다. 이 단계에서 스님이나 지인이 들려주는 독송을 자세하게 집중해서 듣고,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해탈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채면, 어느 날이든 바로 눈부신 지혜의 빛을 따라 해탈에 이른다.</p>
<p> </p>
<p>하지만 이 14일 동안에도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하면 이제 바르도체는 시드파 바르도 단계로 가게 된다. 이것은 21일(+14일)동안 이어지는데, 의식은 맑고 강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며 업력은 매우 강하게 작동하여 마치 몸을 가지고 있었을 때처럼 감각기관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여 이 단계에서의 환영은 우리를 해탈로 이끄는 보신(報身)이 아니라 육도의 아비규환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르도체는 “겁에 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무데로나 도망칠 것이다” 다시 말해 허둥지둥 아무 자궁이나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궁의 문을 막고, 그 환영이 업력의 결과일 뿐 마음의 본성은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의 길로 가거나, 아니면 비교적 좋은 자궁을 선택하여 환생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육도 중 인간계로 환생하는 것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전생에 쌓아던 수행을 깔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p>
<p> </p>
<p>그런데 여기서 윤리적 아젠다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인데, 우선 첫번째는 ‘퇴돌’, 즉 듣는 것 만으로도 영원한 자유, 즉 해탈,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비심을 갖고 죽은 자에게 이 텍스트를 읽어주는 ‘죽음의 벗’과 소리의 파동을 통해 이 텍스트에 연결되어 기어코 깨달음의 길로 나서겠다는 죽은 자의 염원이 공존한다. 텍스트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실상 평상시 충분히 수행을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중간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낮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모두가 이 가르침을 통해 틀림없이 영원한 자유에 이를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심지어 “이것에 실패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p>
<p> </p>
<p>하지만 이것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살아있을 때 제대로 수행을 해야만 죽는 순간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강한 정신집중과 내관의 활성화를 통해 본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단박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귀의가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삼보를 본보기로 귀의한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해왔던 고통의 소멸과 영적인 상태에 믿음의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서도 동시에 자비심의 공동체 속에서 함께 구원받는다.</p>
<p> </p>
<p>두번째로 내가 이 텍스트의 윤리적 함의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생’ 사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화신(化身)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어에는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구하지 않는다면 나 홀로 니르바나에 들지 않겠다는 부처님의 윤리적 결단이 느껴진다. 사족이지만 지혜 못지 않게 티벳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보리심’ 즉 자비의 마음이다.</p>
<p> </p>
<p>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유정이 공동의 업력으로 묶여져 있는 ‘중생(衆生)’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리고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지금의 삶도 일종의 바르도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죽음에 대해서만 모르고 질문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아무런 질문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 &lt;티벳 사자의 서&gt;를 덮으면서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삶이라는 그 중유적 단계에 대해, 그리고 내 삶 속에 순간 순간 박혀있는 또 다른 바르도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비심을 갖고 발원하고,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틈의 순간에 존재를 걸어보자. 백척간두 진일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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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10/6700fc4dc5a058915613.jpeg" al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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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류시화 번역, &lt;티벳 사자의 서&gt;, 정신세계사, p249 치카이 바르도 중)</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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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10/6700fc4dda7388866733.jpg" al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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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달라이 라마를 좋아하는 사람</p>
<p>-&lt;티벳사자의 서&gt;를 언젠가 한번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p>
<p>-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사람</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Sat, 05 Oct 2024 17:38: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6"><![CDATA[나이듦을 읽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불교와 영성&gt; 1강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41]]></link>
			<description><![CDATA[<p class="p3">나이듦연구소에서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강사님이신 요요샘의 인터뷰를 기획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lt;불교와 영성&gt;이라는 강의 주제가 범위가 너무 넓어 보이기도 하고, 그냥 왠지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는 주변의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요샘은 인터뷰에서, 왜 지금 영성을 이야기해야하는지, 왜 불교와 영성인지, 또한 나이듦연구소에서 영성 공부를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셨다. 그 효과인지, 하나 둘씩 세미나의 참여자가 늘어 이번 강의는 총 19명의 학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p>
<p> </p>
<p class="p3">첫번째 강의 주제는 역시, ‘왜 지금 영성인가’였다.</p>
<p class="p3">요요샘은 “영성이란, 지적 인식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한 탐구와 실천”이라고 정의했다.</p>
<p class="p3">나는 “실천”이라는 단어가 맘에 들었다. 영성을 알지도 못하지만 실천으로 나를 바꿀 수 있는 근원이 될 수 있는 무엇이라니, 흥미가 돋았다.</p>
<p> </p>
<p class="p3">영성이란 무엇인가.</p>
<p class="p3">영성(spirituality)의 어원은 그리스어 pneuma를 라틴어로 번역한 spiritus로 pneuma는 원래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spirutus는 영, 육체를 움직이는 비물질적 원리라는 의미이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의 원 뜻도 ‘숨’이라는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호흡하는 ‘숨’이라는 게 이렇게 심오한 것이었다니 싶다.</p>
<p> </p>
<p class="p3">영성을 이해하기 위한 네 가지의 관점</p>
<p class="p3">1.푸코: 나 자신의 변화 없이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다.</p>
<p class="p3">푸코는 고대 철학의 탐구를 통해,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으로 봤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에는 정화, 수련, 포기, 관점을 바꾸는 것 등등이 있다. 여기에는 자기배려도 포함되며 영성이라는 문제계에 자기 변형을 위한 탐구/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p>
<p> </p>
<p class="p3">2.헉슬리: ‘신성한 실재’라는 공통 요소 - 영원의 철학</p>
<p class="p3">푸코의 역사적 관심과 달리, 헉슬리는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영성을 추구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그리고 모든 종교가 가진 공통 요소로 신성한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사물, 생명 마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며, ‘영성이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신성한 실재가 있다는 믿음’이라고 했다. 그것은 도(道), 인(仁), 불성(佛性)과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공통요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수행인데, 여기에는 침묵, 기도, 영적 훈련, 묵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p>
<p> </p>
<p class="p3">3.나카자와 신이치: 만물에 깃들어있는 유동적 지성이 바로 영성이라는 비종교적 입장</p>
<p class="p3">나카자와 신이치는 인류학적, 유물론적 관점으로 영성을 바라봤다. 인간은 원래 영성을 추구하고 영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원인 현생인류가 가진 뇌구조의 영향이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신이치는 인간의 뇌 혹은 마음에 서로 다른 것을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며 교환가능한 대칭적으로 만드는 유동적 지성이 있다고 봤다. 유동적 지성은 초월성과 같은 종교적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신이나 종교가 먼저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영성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이다.</p>
<p> </p>
<p class="p3">4.SBNR(Spritual But Not Religious)의 등장</p>
<p class="p3">위의 세 관점은 영성을 이야기 할때 종교를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가 영성을 독점할 수 없는 시대이다. 종교와 영성이 분리된 것이다.</p>
<p class="p3">종교와 영성의 분리에 대해서는 필립 셀드레이크의 &lt;영성이란 무엇인가&gt;를 인용해 이렇게 정리해 주셨다.</p>
<p class="p3">-서양 영성 문화에서 영성이 제도적 종교에 비해 현재의 필요성에 더 부합한다는 입장</p>
<p class="p3">-영성은 신념보다 일련의 실천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p>
<p class="p3">-세계화, 사이버 공간의 확장</p>
<p class="p3">-영성을 매개로 한 종교간 대화</p>
<p class="p3">-영성과 돌봄(영적 보살핌), 영성과 건강(영적 건강)의 강조</p>
<p class="p3">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것이 신비주이다. 종교학자 성혜영은 ‘종교 이후의 종교’를 신비주의와 엑스터시라고 말한다. 엑스터시는 흔히 알고 있는 황홀경이 아닌 ‘밖에 선다’는 의미이다. 내 좁은 에고에서 탈피해 자기 밖에 서는 경험, 그것은 일견 유동적 지성과도 통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변형하는 실천이다.</p>
<p> </p>
<p class="p3">5.사회적 영성, 공동체적 영성</p>
<p class="p3">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성이다.</p>
<p class="p3">신비주의적 관점에서의 문제는 영성이 개인의 경험으로 좁혀진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등장한 것이 사회적 영성이다. 이것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참여와 연대를 포함한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성의 주체가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설정되거나 영성이 실용적인 힐링담론이나 치유서사로 소비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p>
<p class="p3">"타자와와 관계에서도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것은</p>
<p class="p3">종교의 핵심이, ‘신적인 황홀이나 열광에서 벗어나 나를 뛰어넘어, 나 바깥의 초월자와 관계 맺는데 있다’고 보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다"라는 요약문의 내용도 기억에 남는 문구이다.</p>
<p> </p>
<p class="p3">강의를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p>
<p class="p3">송지샘도 말씀해주신 것처럼</p>
<p class="p3">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안의 영성을 찾아내어,</p>
<p class="p3">사회적 영성으로 발현시킬 수 있도록 유동적 지성을 사용해야겠다는 것이다.</p>
<p class="p3">하지만 그러려면 갈 길은 멀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실천을 해야하니까. 실천을 하려면 많은 수행이 필요하니까. -.-;;</p>
<p> </p>
<p class="p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영성을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요요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p>
<p> </p>
<p class="p3"><span style="color:#0000ff;">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span></p>
<p class="p3"><span style="color:#0000ff;">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span></p>
<p class="p3"><span style="color:#0000ff;">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span></p>
<p class="p3"><span style="color:#0000ff;">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span></p>
<p class="p3">&lt;법구경&gt; 중에서</p>
<p> </p>
<p class="p3">여기서 <span style="color:#0000ff;">등불</span>이 바로 우리의 영성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p>
<p> </p>
<p class="p3">마지막으로,</p>
<p class="p3">이번주 리뷰를 쓰실 분들의 참여 동기를 전한다.</p>
<p class="p3">천유상샘은 르귄의 소설 &lt;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gt;이라는 소설을 읽고,</p>
<p class="p3">먼불빛샘은 퇴사의 번뇌를 떨치기 위해</p>
<p class="p3">앙코르석공님은 요요샘의 팬으로서</p>
<p class="p3">미리내님은 불교학교의 보강 차원에서</p>
<p class="p3">나는 나이듦연구소의 일원으로 새로운 노년의 발명을 위한 실천적 공부가 참여이유이다.</p>
<p><br />
참여 동기에 걸맞은 후기도 기대해본다. ㅋㅋ</p>
<p> </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at, 05 Oct 2024 14:51: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0"><![CDATA[강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4년 10월] 고령자는 운전하면 안 되나]]></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20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6611f4d78761441.jpg" alt="" /></p>
<p> </p>
<p>◆ 나이듦 아카이빙은 나이듦연구소에서 만드는 기존 저널의 재편집판입니다.</p>
<p>나이듦, 죽음, 애도, 돌봄과 관련된 주요 게시물을 요약하여 매달 1회 발행됩니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69898092917776.jpg" alt="" /></p>
<hr />
<p> </p>
<p><strong><span style="font-size:17px;">고령자의 운전면허</span></strong></p>
<p> </p>
<p>최근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율이 증가하면서 조건부 운전면허 제도가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는 안전운전이 염려되는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개인별 운전 능력에 따라 시간·공간 제한 및 첨단 안전장치 부착 등 맞춤형 운전 조건을 부과하는 제도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은 운전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고령자나 지방에 거주하는 고령자들의 이동을 고려하지 않는 제도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교통사고율에서 고령층의 비율이 높아진 것은,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다른 연령대에 비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p>
<p> </p>
<p>정부에서는 2019년부터 고령자가 자진해서 운전면허를 반납할 경우 지역별 인센티브(선불교통카드, 현금, 지역화폐 등)를 제공하고 있지만 반납률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절차가 번거롭고 인센티브가 미미하다는 점이 이유로 지적된다. 때문에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지방에서 반납률이 더 떨어진다. 전체 운전자의 10명 중 한 명이 고령 운전자인 시대이다.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개인의 이동권과 타인의 안전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운전을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안전운전을 지원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p>
<p> </p>
<p>일본에서는 2022년 5월, 안전운전을 보조하는 여러 장치를 탑재한 차에 한해 운전면허를 발급하는 ‘서포트카 한정 면허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페달을 잘못 조작했을 때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를 탑재한 자동차가 출시되었다. 또한 현재의 적성검사 방식으로는 실제 주행능력을 평가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고위험군 운전자의 운전능력 평가방법과 조건부여 등을 위한 연구 개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조건부 운전면허 제도를 시행하여 다른 연령대에 비해 고령층을 더 엄격하게 심사하는 외국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p>
<p> </p>
<p>[관련 기사]</p>
<p>▶ 운전면허 반납 대신 안전 운전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자(국민일보)</p>
<p>▶ 초고령화 시대, 나이와 운전 능력을 함께 고려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브라보마이라이프)</p>
<p>▶ 조건부 면허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외국의 사례(오마이뉴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698b14d3568954.jpg" alt="" /></p>
<hr />
<p> </p>
<p><span style="font-size:17px;background-color:#ccffcc;"><strong><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노년주거</span> <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혼삶족</span></strong></span></p>
<p> </p>
<p><strong>▶ "자식 눈치? 혼자 살겠다" 병세권, 역세권에 몰리는 노년 혼삶족(중앙일보)</strong></p>
<p> </p>
<p>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1인 가구 중 60~70대의 비율이 38.7%로 가장 높았다.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졸혼한 뒤 혼자 사는 노령층이 증가한 때문이다. 이들이 혼삶족을 표방하면서 역세권, 병세권 실버타운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실버타운 대신 역세권 오피스텔이나 소형 아파트를 선택하는 혼삶 노인도 늘고 있다. 반면에 지자체 등이 건립하는 양로원이나 요양원 등 전통적인 노인시설은 입소자격에 큰 제한이 없지만 찾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러한 현상을 작은 평수의 주거 시설이 많아져 집을 따로 구하기 힘들지 않다 보니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선택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노인들도 자녀 세대와 함께 살며 눈치를 보는 것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선호하는 데 있다.</p>
<p> </p>
<p><strong>▶ 치매 환자도 안전한 집, 집수리를 넘어선 고령자 주택 개조(브라보마이라이프)</strong></p>
<p> </p>
<p>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는 20년간 고령자 주택 개조 가이드와 매뉴얼을 만들어 온 노후 주택 수리 전문가다. 그는 이 일을 단순 집수리가 아니라고 본다. 고령자에 맞춘 노화 대응사업에서는 용변, 외출, 식사, 취침 등 노인의 행위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령자가 살고 있는 100곳의 집을 방문하면 100개의 다른 솔루션이 나온다. 같은 공간이라도 생활패턴이 다르고 주택의 구조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조 작업에 대한 수요도 만족도도 높지만 국내에 고령자 맞춤형 안전용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걸림돌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전용품 설치를 꺼려하는 사례도 있다. 고령자에게 안전한 주거환경은 자립 생활의 핵심이다. 누구나 자신의 집을 주기적으로 진단하고 안전하게 바꾸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background-color:#ccffcc;"><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돌봄</span> <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I</span></span></strong></span></p>
<p> </p>
<p><strong>▶ 우울증도 예방하는 ‘노인 돌봄 로봇’ 효돌이(한겨레신문)</strong></p>
<p> </p>
<p> 효돌이는 노인 곁에서 기상 시간, 약 복용 시간, 병원 가는 날 등 일과를 그때그때 알려 준다. 노인의 건강상태를 기록한 뒤 데이터화해 ‘맞춤형 돌봄’에 활용한다. 움직임에 이상이 생기면 담당 생활 관리사나 복지사, 보호자 등에게 즉시 알림을 보낸다. 이러한 역할로 셋팅 된 노인 돌봄 로봇 효돌이를 곁에 두고 지내는 노인이 1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효돌이를 탄생시킨 김지희대표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전자 회사 퇴사 후 노인복지에 관심이 많아서 노인 자서전 사업을 하던 중, 고립된 독거 노인의 말벗에서 창안해 손주 같은 반려 로봇 효돌이를 만들게 되었다. 쉬운 사용성에 주안점을 두고 로봇에 7살 어린이 정체성을 부여했다. 임영웅의 노래도 척척 불러주는 손주같은 효돌이와 노인들은 정서적 교감을 넘어 애착관계를 형성했다. 효돌이를 사용해 본 독거노인들이 우울증 지수가 감소되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김지희대표는 앞으로 노인의 취향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맞춤형 반려 로봇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e01364e8173029008.jpg" alt="" /></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4px;">효돌이와 김지희대표, 사진 : 한겨레신문</span></p>
<p> </p>
<p><strong>▶ 독거노인 살피는 친절한 안부전화, 네이버 '클로바 케어콜'(아주경제)</strong></p>
<p> </p>
<p> 클로바 케어콜은 돌봄이 필요한 독거노인이나 중장년 1인 가구에 AI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서비스이다. 올해 8월 기준 서울, 경기, 부산, 광주, 전북, 강원, 충남 등 전국 128곳 시군구에 도입되어 약 3만명의 독거노인을 살피고 있다. 네이버 케어콜은 전화를 통해 상대의 안부, 건강상태를 체크하며 이전 대화를 기억하는 기능으로 연속성 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아픈 데는 없으세요?’라는 질문에 ‘허리가 아파요’라고 답했다면, 다음 번 전화에서는 ‘허리 아픈 건 좀 어떠세요?’라고 물어볼 수 있다. 최근 순천시에서 복지사가 케어콜 대화에서 건강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 응급 처치로 위급상황을 넘긴 사례도 있었다. 향후에는 일상 안부 대화 외에 치매 예방 대화, 만성질환자 관리와 같은 목적성 대화 시나리오도 갖출 예정이라고 한다.</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background-color:#ccffcc;"><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치매마을</span> <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치매돌봄</span></span></strong></span></p>
<p> </p>
<p><strong>▶ 영국의 세대 간 돌봄 주택 'Belong’, 치매환자도 아우르는 소셜믹스 실험( 머니투데이)</strong></p>
<p> </p>
<p> 영국 체스터의 치매환자 지원 주택단지 '비롱'(Belong)에는 1층에 영유아 보육시설이 있다.  거주자는 언제든지 아이들을 방문할 수 있다. 마을 곳곳에서 세대 간 즉흥적 만남과 모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소셜믹스(Social mix·사회적 혼합) 설계를 도입한 결과다. 70~90대 노인들이 탁아소 내 상설공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것저것 고치고 만들어 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도 한다. 치매 환자는 단기 기억이 먼저 손상되고 장기 기억은 나중에 손상되기 때문에 이런 활동들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도 노화가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고 타인에게 뭔가를 주거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세대간 주택 개발은 노년의 외로움을 연결된 커뮤니티를 통해 해결하려는 공중보건 솔루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탁아시설과 통합된 요양원, 대학캠퍼스의 은퇴자주택 등이 그 사례이다. 이들의 특징은 시설보다는 커뮤니티와 지식 공유에 더 주안점을 둔다는 점을 새겨볼 만하다.</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e0136302399060412.jpg" alt="" /></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4px;">비롱(Belong) 마을, 사진 : 머니투데이</span></p>
<p> </p>
<p> </p>
<p><strong>▶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이 지속되는 돌봄, 호주의 치매마을 코롱지(디멘시아뉴스)</strong></p>
<p> </p>
<p> 2020년에 문을 연 호주 최초의 치매마을 코롱지는 주거형 노인 케어시설로 시의 외곽 10분 거리에 있다. 코롱지 마을은 가족들이 치매노인과 함께 사는 가정 모델을 중심으로 지어졌는데 치매 전문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가족들을 지원하고 있다. 12채의 주택에 96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은 거주민들의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집, 카페, 미용실, 커뮤니티센터, 식료품점을 연결하는 길은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연결되어 치매 환자들에게 자연스러운 길찾기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슈퍼마켓, 영화관, 카페, 미술과, 과수원, 갤러리가 있고 서로 연결된 정원과 활동구역이 힐링 공간의 역할을 한다. 코롱지는 주민들에게 친숙하고 안전하며 집처럼 편안한 공간을 제공한다. 존엄성을 유지하며 치매 케어가 가능한 마을의 좋은 사례이다.</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background-color:#ccffcc;"><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죽음</span> <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엔딩서비스</span></span></strong></span></p>
<p> </p>
<p><strong>▶ 생전에 내가 준비하는 삶의 마무리, 엔딩 플래너 서비스(SBS)</strong></p>
<p> </p>
<p>신한카드에서 엔딩 플래너 서비스, ‘조상님복덕방’을 출시했다. 자신의 사후 유산, 장례 등에 관해 분쟁 없이 사후처리가 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유언장의 작성이나 보관과 같은 상속 재산 분할 등 자산관리 뿐 아니라 추모공간선택, 이장, 벌초대행도 해준다. 과거의 엔딩서비스가 상조회사가 주도하는 장례서비스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금융권에서 법률자문과 같은 전문 분야를 접목해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p>
<p> </p>
<p><strong>▶ 안락사 캡슐은 살인기계인가, 존엄한 선택인가(한겨레신문)</strong></p>
<p> </p>
<p> 최근 60대 중반의 미국인 여성이 ‘사르코’(Sarco)란 이름의 자살 캡슐을 이용해 목숨을 끊었다. 사르코는 필립 니츄케라는 의사가 고안한 도구로, 이번에 처음 사용됐다. 사르코는 사람이 들어간 뒤 뚜껑을 닫으면, ‘당신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등을 묻는 자동 음성이 나온다. 질문에 답하고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면 몇 분 뒤 사람은 잠에 빠지고 숨을 거둔다고 한다. 조력자살을 돕는 스위스 단체의 공동 의장은 자신이 유일하게 이번 사르코 캡슐에 의한 임종을 지켜봤다며 “평화롭고 빠르고 위엄있는 죽음”이었다고 주장했다. 스위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락사의 일종인 ‘조력자살’(PAS)을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법적인 조력자살과 불법적인 자살 조장 및 방조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스위스 당국은 사르코 캡슐이 스위스법 상 안전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며 사용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background-color:#ccffcc;"><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간병비지원</span> <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돌봄정책</span></span></strong></span></p>
<p> </p>
<p><strong>▶ 간병지원 시범사업 손실 심각, 하차하겠다는 요양병원(의료&amp;복지뉴스)</strong></p>
<p> </p>
<p>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전국의 20개 요양병원을 선정해 7월부터 간병비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 사업에 선정되었던 A병원이 시범사업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매달 3천만원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범사업의 프로세스에 있다. 시범사업 참여 요양병원은 의료최고도와 의료고도 환자 중 간병비지원 대상자를 선정해 건강보험공단에 심사를 요청한다. 그러면 공단이 의료-요양 통합판정 방식으로 간병비 지원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건보공단 통합판정 인력 부족으로 심사가 한 달에 한 번씩만 진행되는 까닭에 요양병원은 대상자가 선정될 때까지 병상을 비워두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또한 한 달 사이에 결원이 발생할 경우에도 심사 지연으로 인해 빈 병실이 계속 늘어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료-요양 통합 판정에도 문제가 있다. 시범사업 요양병원들이 환자 보호자를 대신하여 간병비를 신청했을 때 공단과의 판정 기준 차이로 약 25%가 탈락한다. 판정도 지연되고 탈락자도 많다 보니 요양병원의 빈병실로 인한 손실 문제는 더욱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698bc8c5256360.jpg" alt="" /></p>
<hr />
<p> </p>
<p><strong><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4325f8d4017413.jpg" alt="" width="204" height="205" /> &lt;내가 알던 사람: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gt;, 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2024</strong></p>
<p>“너는 나를 잊어버리지 마라. 나는 너를 잊어도”</p>
<p>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과학자 아버지를 7년간 돌본 신경정신과 아들의 가족 돌봄기이자 뇌의 퇴화와 기억에 대한 탐구서이다. 원제는 &lt;My Father‘s Brain&gt;. 아버지의 행동이 뜬금없고 불가해하고 목적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아버지의 상태에 관한 과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을 축적하는 일은 아버지의 욕구를 파악하는 동시에 자신을 더욱 세심히 돌보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한편, 저자는 “대체 기억이 뭐길래”라는 화두를 들고 우리 자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통해 기억의 정체와 의미, 네트워크에 관해 성찰하며 기억의 본질을 활용한 관계의 재구성에 관한 경험담을 풀어놓는다.</p>
<p> </p>
<p><strong><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4af08754813565.jpg" alt="" width="204" height="205" /> &lt;와해된 몸:크나큰 고통 이후를 살아가다&gt;, 크리스티나 크로스비 지음, 최이슬기 옮김, 에디투스, 2024</strong></p>
<p>퀴어 페미니스트 학자이자 왕성한 활동가였던 크로스비는 쉰 생일을 갓 넘긴 어느 날 자전거 사고로 인생의 변곡점을 맞는다. ‘강인하고 유능하며 매력적인 여성’은 하루아침에 척수 손상으로 인해 전기가 흐르고 신경학적 폭풍이 휘몰아치는 황무지를 밤낮으로 횡단하는 여행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동이 이끄는 대로 고통의 지형도를 그린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 어느 것 하나 비루한 것으로 포기하지 않으며 글쓰기를 이어간다. 그 끈질긴 작업의 결과는 우아하고도 무시무시한 회고록이다. 이 책은 손쉬운 자기연민과 고난극복의 서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있다. 동시에 파괴된 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너절하고, 취약하며, 퀴어할 수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주기를 요청한다.</p>
<p> </p>
<p><strong><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433de502208162.jpg" alt="" width="204" height="204" /> &lt;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gt;,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책읽는고양이, 2024</strong></p>
<p>일본의 소설가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원제는 &lt;戒老錄: 自らの救いのために&gt;(1999년). 시부모님 두 분과 친정 어머니 이렇게 세 명의 노인과 한 집에서 살아온 작가가 평소 기록해 온 늙음을 경계하는 글(戒老錄)을 모아 펴낸 책이다.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주면 늙음을 자각할 것’,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인사치레는 포기할 것’, ‘교제 범위나 매너를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지 말 것’, ‘칭찬하는 말조차도 주의할 것’ 등에서부터 소소하게는 ‘짐을 들고 다니지 말 것’, ‘저녁에는 일찌감치 불을 켤 것’, ‘자주 씻을 것’,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물건을 줄여나갈 것’, ‘화장실 사용 시 문을 꼭 닫고 잠글 것’ 등등 노화에 대한 자각 포인트와 늙음을 경계하는 지혜를 콕콕 짚어준다.</p>
<p> </p>
<p><strong><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4af2e637883013.jpg" alt="" width="204" height="204" /> &lt;돌봄의 얼굴: 요양보호사들의 일기&gt;, 김영희 외,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기획, 봄날의 책, 2024</strong></p>
<p>‘당신은 어떤 요양보호사를 만나고 싶은가?’ 우리가 늙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돌봄의 끝에서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람, 요양보호사. 이들은 노인들이 혼자서 꾸려가기 어려운 일상의 면면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일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함께 밥을 먹으며, 산책을 하며, 그들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고 바깥 출입이 어려운 노인들에게는 길 위의 풍경을 전해주는 전령이 되기도 한다. 그리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우리 주변의 그저 평범한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이 글은 2021년 옥희살롱에서 진행했던 ‘요양보호사를 위한 온라인 사진 + 글쓰기 워크숍’과 그 후 반년 정도 ‘밴드’를 통해 이어졌던 후속모임에서 일곱 요양보호사들이 쓴 글의 일부이다.</p>
<p> </p>
<p><strong><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4aed4eb2565633.jpg" alt="" width="204" height="204" /> &lt;모두의 돌봄 2부 - 우리 집이 좋아&gt;, KBS 다큐온, 2024년 9월 22일 방영</strong></p>
<p>아프더라도 요양원에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 아니 요양원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노후에 건강이 악화되더라도 살던 집에서 계속 살면서 재가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의견이 50%를 넘었다. 시설에 가겠다는 의견은 31%에 그쳤다. 시설이 아닌 살던 곳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 의료·돌봄 통합지원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이는 보건복지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자체가 함께 주거, 보건의료, 요양, 돌봄 등을 통합적으로 연계·제공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노인돌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알아본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1/202410/66fdf7698a6051898631.jpg" alt="" /></p>
<hr />
<p> </p>
<p><strong>[이달의 이슈]</strong></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25355166">▶ 운전면허 반납 대신 안전 운전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자(국민일보)</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bravo.etoday.co.kr/view/atc_view/15645">▶ 초고령화 시대, 나이와 운전 능력을 함께 고려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브라보마이라이프)</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2171&amp;CMPT_CD=SEARCH">▶ 조건부 면허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외국의 사례(오마이뉴스)</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7422">▶"자식 눈치? 혼자 살겠다" 병세권, 역세권에 몰리는 노년 혼삶족(중앙일보)</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bravo.etoday.co.kr/view/atc_view/15676">▶ 치매 환자도 안전한 집, 집수리를 넘어선 고령자 주택 개조(브라보마이라이프)</a></span></p>
<p> </p>
<p>#돌봄 #AI</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58618.html">▶ 우울증도 예방하는 ‘노인 돌봄 로봇’ 효돌이(한겨레신문)</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ajunews.com/view/20240905134616275">▶ 독거노인 살피는 친절한 안부전화, 네이버 '클로바 케어콜'(아주경제)</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ajunews.com/view/20240905134616275">▶ </a><a href="https://www.ncloud.com/product/aiService/clovaCareCall">손숙씨의 네이버 클로바 케어콜 소개영상</a></span></p>
<p> </p>
<p>#치매마을 #치매돌봄</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m.mt.co.kr/renew/view.html?no=2024091506373685356">▶ 영국의 세대 간 돌봄 주택 'Belong’, 치매환자도 아우르는 소셜믹스 실험( 머니투데이)</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dementi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60">▶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이 지속되는 돌봄, 호주의 치매마을 코롱지(디멘시아뉴스)</a></span></p>
<p> </p>
<p>#죽음 #엔딩서비스</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803416&amp;plink=LINK&amp;cooper=YOUTUBE">▶ 생전에 내가 준비하는 삶의 마무리, 엔딩 플래너 서비스(SBS)</a></span></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159641.html">▶ 안락사 캡슐은 살인기계인가, 존엄한 선택인가(한겨레신문)</a></span></p>
<p> </p>
<p>#간병비지원 #돌봄정책</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www.mediwelfare.com/news/articleView.html?idxno=4006">▶간병지원 시범사업 손실 심각, 하차하겠다는 요양병원(의료&amp;복지뉴스)</a></span></p>
<p> </p>
<p>[에디터스 픽]</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amp;sname=vod&amp;stype=vod&amp;program_code=T2020-0388&amp;program_id=PS-2024173436-01-000&amp;broadcast_complete_yn=N&amp;local_station_code=00&amp;section_code=05&amp;section_sub_code=08#refresh">KBS 다큐온, 우리집이 좋아</a></span></p>
<p> </p>]]></description>
			<author><![CDATA[나이듦연구소]]></author>
			<pubDate>Thu, 03 Oct 2024 11:22: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7"><![CDATA[월간 나이듦 아카이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8 후기] 어려웠지만 쫄깃한 쾌감이 느껴진 &lt;젠더 트러블&gt; 완독!]]></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03]]></link>
			<description><![CDATA[<p>드디어 &lt;젠더 트러블&gt;을 마쳤다.</p>
<p>주디스 버틀러 책이 읽기 쉽지 않아, 이보다 먼저 &lt;쉽게 읽는 주디스 버틀러&gt;라는 해설서도 읽었지만 역시나 그 명성만큼 &lt;젠더 트러블&gt;을 읽는 일은 내게 고행이었다. 문장도 어렵고, 기본전제를 뒤흔드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내용 때문에 줄줄이 물음표를 쳐놨다. 매주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책망하며 책을 읽었다. 올해는 어차피 망했는데, 내년에 들뢰즈 공부하자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쓸데없는 고민까지 가끔 당겨서 하곤 했다. </p>
<p> </p>
<p>그래서인지 오늘은 더욱 기쁘고 후련한 날! (물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아서...)</p>
<p>각자 &lt;젠더 트러블&gt;을 1개 절 이상 선택해 요약하거나 에세이를 써서 발표했다. 나는 정말 딱 한 절, 최소 범위를 요약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시 읽는데도 초면 같았고, 또다시 읽으니 좀 알겠다 싶어 고개가 끄덕여졌는데도 막상 키보드 앞에서 머리와 손가락은 얼음이 됐다. 내 식으로 정리하는 건 안 되고, 거의 발췌 수준으로 겨우 요약했다. 고작 그렇게만 했는데도 약간 뿌듯했다. ㅋ</p>
<p>우리는 미리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모아 놓고 보니 책의 이곳저곳을 골고루 선택해 정리했다. 덕분에 발표를 듣는 동안 책 한권의 개요를 훑은 것 같았다. 아쉬운 건, 입이 떨어지지 않아 동학들의 글에 질문이나 평을 하지 못했다는 것. ㅠ.ㅠ. 개인 사정으로 두 분(풍경샘, 미정샘)이 함께 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p>
<p> </p>
<p>문탁 샘은 우리 글에 대해 "각자 정리한 부분은 다 알고 썼다는 게 느껴져 이번에도! 기쁘다"라고 말씀하셨다. 문탁 샘이 우리와 공부하시느라 기준을 많이 낮추신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란다.) 격려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크게 실망하신진 않은 것 같아 그것도 다행이다. (데헷)</p>
<p>늦게까지 함께 해주신 서해, 루틴, 무사 세 분께도 감사드린다. </p>
<p> </p>
<p>버틀러가 말한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다. 정체성은 결과라고 알려진 바로 그 '표현물' 때문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131쪽)"는 니체의 &lt;도덕의 계보학&gt;에서의 이 문장을 응용한 것이다. "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위자'는 그 행위에 부가된 허구에 불과하다. 행위만이 전부이다."</p>
<p>실로, 꾸역꾸역 읽어나간 그 행위만이 전부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부분이 월등히 더 많지만 어쨌든, 큰 산을 넘은 기분이고 분명 읽기 전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되었다(헛소리니 너무 진지하게 읽지는 마시길 ^^). 조금씩은 달라진 우리 모두 이제 다음주 한 주 쉬고 10월 16일에 다시 또다른 버틀러 책을 들고 만나요~ </p>
<p> </p>
<p>덧붙임. 너무 간단한 후기라...  수고한 우리에게 ^^</p>
<p>125쪽에 소개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TMI. 캐롤 킹이 작사 아니라 작곡함)</p>
<p><a href="https://youtu.be/efIAM5dzuDs?si=KQu_tLmBg_grU7ti">https://youtu.be/efIAM5dzuDs?si=KQu_tLmBg_grU7ti</a></p>]]></description>
			<author><![CDATA[김지영]]></author>
			<pubDate>Wed, 02 Oct 2024 23:53: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1"><![CDATA[강학원프로그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개념탐구학교 3분기 갈무리 - 나에게 &lt;젠더 트러블&gt;은? (10.2 발표에 초대합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0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939f72870642.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99dd47988353.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9e0c04729488.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a148b4943678.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a4e8f6657920.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a8f588894818.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8f0b7abf3c9595631.jpg" alt="" /></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Sun, 29 Sep 2024 15:17: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1"><![CDATA[강학원프로그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리뷰29]죽음 앞에 선 인간_&lt;이반일리치의 죽음&gt;]]></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9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f7b9e335f269468577.jpg" alt="" /></p>
<p> </p>
<p> </p>
<p><strong>누구나 죽는다. 그러나</strong></p>
<p> </p>
<p>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첫머리는 아주 유명하다. 이 소설은 고등법원 판사인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받은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로 시작한다. 그의 부고를 듣자마자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부고를 들은 동료들의 생각을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그려내었다. 그의 동료들은 각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 일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계산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lt;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gt;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이반 일리치와 아주 가까웠던 이른바 친구라는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예절이라는 이름의 대단히 지겨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상기했다.”</span></p>
<p> </p>
<p>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부고란을 통해 뉴스를 통해 매일같이 죽음을 접하지만, 그 죽음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럴 때 죽음은 사회적 현상이고 통계적 사실에 지나지 않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범속한 사건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는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바로 이런 태도를 ‘죽음’의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3인칭적 관점이라고 구분하고,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일상성이라고 표현한다.</p>
<p> </p>
<p>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적 삶은 일상에 빠져 있는 세인들,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일에 몰두해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다.(『존재와 시간』)”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곧 괜찮아져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상의 무사태평이 방해되거나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타인의 죽음에서 속수무책까지는 아니어도 일종의 사회적 언짢음을 보게 된다.”(『존재와 시간』) 이반 일리치의 절친한 동료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문상을 가서 죽어 있는 이반 일리치를 보고, 그의 부인에게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사흘간의 단말마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역시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lt;사흘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이건 언제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다.&gt; 이렇게 생각하자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일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러나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어날 수도 없다.”</span></p>
<p> </p>
<p>하이데거에 따르면 타인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언짢음이야말로 비본래적 삶을 자각하고 자신의 실존론적 본질을 성찰할 기회다. 그러나 일상성에 매몰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비겁한 두려움, 음울한 세계 도피”로 생각하고, 삶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써 다시 일상의 안정감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그 불안에 직면하는 것은 어떨 때 가능해지는 것일까?</p>
<p> </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f7bf37ada504362862.jpg" alt="" width="457" height="621" /></p>
<p style="text-align:center;">레프 톨스토이</p>
<p> </p>
<p> </p>
<p><strong>죽음 앞에 선 인간, 이반 일리치</strong></p>
<p> </p>
<p>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교양 넘치고 품위 있었으며 사회적 처세도 뛰어나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만인이 연모하는 여인과 결혼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몰두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었다. 승진하여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집을 꾸미다 우연한 사고로 옆구리를 다친 후 그는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다. 병석에 누워 이반 일리치는 논리학 시간에 배운 삼단논법을 떠올렸다.</p>
<p> </p>
<p>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너의 죽음이 현재형이거나 과거형인 것과 달리 나의 죽음은 언제나 미래시제로만 존재한다. 죽음은 그토록 멀리 있다. 이반 일리치 역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 사실에 익숙해질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한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그렇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필멸의 인간이니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 바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span></p>
<p> </p>
<p>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찾아와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마주한다. 죽음과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갖은 노력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죽음은 모든 벽을 뚫으며 침투해 들어와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 같았다.” 죽음 앞에 선 인간, 이반 일리치는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의 고통은 세상이 모두 거짓으로 가득하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 역시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본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그가 보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span></p>
<p> </p>
<p>그는 아내와 자식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보살펴 주기를,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원 동료가 찾아오면 이반 일리치 그 자신 역시 근엄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맞았고, 재판의 이런저런 사항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고집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외면하는 세상의 거짓에 치를 떨었지만, 그 자신 역시 그 거짓의 놀이를 구성하는 일부로 살았다.</p>
<p> </p>
<p>자신의 존재를 무화(無化)시키는 죽음을 긍정할 수 없었던 이반 일리치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항의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다 그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침묵의 대화 속에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미 알지만 아직 모르고, 알면서도 새삼 깨닫고, 들어와 있으면서도 불쑥 찾아오는 메시지”(장켈레비치,『죽음』)였다. 그 메시지 앞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는가를 되새기며 그 이상한 생각을 바로 떨쳐버렸다.”</p>
<p> </p>
<p>『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자신이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부조리한 죽음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면, “아찔한 도약“(『죽음』)이 필요하다. 죽음의 확실성을 자신의 일로 실감하는 것은 그토록 급격한 전환, 하나의 심연을 건너뛰는 실존적 전환을 요청한다. 그 전환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p>
<p> </p>
<p>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f7b9b361b385495002.jpg" alt="" />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f7b9ac6b3a95205700.jpg" alt="" width="277" height="399" /></p>
<p> </p>
<p> </p>
<p><strong>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strong></p>
<p> </p>
<p>죽기 전 사흘 동안 이반 일리치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이반 일리치에게 그 기간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사흘이었다. 그는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고통은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데서 왔다. 그를 방해하고 있던 것은 “자기의 삶이 좋은 것이었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삶에 대한 정당화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어 그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떤 힘에 의해 그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저쪽에서 무언가 환한 빛이 보였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lt;그것&gt;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span></p>
<p> </p>
<p>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로잡아야 하는 &lt;그것&gt;이 뭐지’, 질문하는 그때, 그는 아들이 그에게 다가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죽어가고 있는 자신과 달리 건강하고 생의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반 일리치에게 연민의 마음이 솟아났다. 지금까지 살고 싶다는 욕망, 남들을 향한 복수와 원한의 감정, 억울하다는 마음 등 그를 괴롭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아내와 자식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고,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무화의 절망’에서 벗어났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lt;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gt;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lt;통증은?&gt;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lt;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 간거야? 그는 귀를 기울였다, &lt;아, 여기에 있었군, 그래, 뭐, 거기 있으라고 해.&gt; &lt;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gt;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span></p>
<p> </p>
<p>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숨을 멈추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무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한다면 죽음 앞에서 본래적 실존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장켈레비치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죽음은 삶의 장애물이면서 삶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 삶의 ‘유한성’은 신비가 된다. 죽음은 존재를 잃는 것인데, 그 잃음이 바로 존재를 구한다는 역설! 그리하여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p>
<p> </p>
<p>톨스토이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원숙한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데거와 장켈레비치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인용한 것 역시 톨스토이의 실존론적 문제의식과 통찰에 깊이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멀리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 “이토록 멀고 이토록 가까운 죽음!”(『죽음』) 우리도 삶과 죽음의 시간을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말한 것 같은 깨달음을 얻는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p>
<p>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f7b9d7ea3022203868.jpg" alt="" /></p>
<p> </p>
<p>= 병과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p>
<p>= 죽음이 아직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p>
<p>=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p>
<p>= 문학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궁구해 보고 싶은 이 누구나</p>]]></description>
			<author><![CDATA[요요]]></author>
			<pubDate>Sat, 28 Sep 2024 17:31: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6"><![CDATA[나이듦을 읽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7 후기] 나는 정말로 시스젠더인가?]]></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01]]></link>
			<description><![CDATA[<p> </p>
<p>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라는 말로 섹스와 젠더를 구분했다.  보부아르는 여/남 이분법으로 분류되는 섹스에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주어진 자연이고, 전제다. 여성과 남성 두가지 성이 있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여성성', '남성성' 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있다고 해서 꼭 남성은 초월적이고 주체가 되고 여성은 내재적이고 타자가 되어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lt;제2의 성&gt; 에서 내내 이야기한 것은 왜 남성은 초월적 주체로서 지위를 선점하고 여성은내재적 타자로 자리매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생물학, 역사, 문학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며 자신의 관점으로 지금(그 책을 쓰던 1940~50년대) 과 같은 젠더가 형성된 것인지 밝히는 것이다. </p>
<p> </p>
<p>버틀러는 젠더가 섹스와 분리가 된다면 젠더가 꼭 두개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버틀러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부아르의 문제제기에서 동성애는 폐재되어 있다. 버틀러는 젠더가 여러개 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그동안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섹스와 젠더의 인과관계를 바꾸어버린다.  신체적으로 여성인 몸이 먼저 있고, 그 몸이 문화적으로 학습하여 젠더를 습득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비판하며, 사실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 하에 이분법적인 젠더가 먼저 있고, 그 젠더의 근거 혹은 효과로서 성별이 두개로 정의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원래부터 젠더였던 것이다.  언어가 문화가 남여로 구분되어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그렇게 구분하는거 너무 이상하지 않냐고 소리치는 것이다. 정말 과감하고 전복적이다.   버틀러는 &lt;젠더트러블&gt; 에서 나는 이름만 들어본, 이름도 처음 들어본 학자들의 여러가지 주장들을 가지고 와서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이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한 번도 해본적 없는 생각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학자들의 주장을 긍정하고 부정하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독자가 무식해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
<p> </p>
<p>강제적 이성애. 사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고,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서 이성애가 강제되었다는 말이 확 와 닿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자인데, 절대 다수인데 자연스러운거 아닌가 라는 생각만 들었다. 기존의 논의들에서 동성애가 폐제되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동성애자라는 존재를 사람들이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책을 읽는 내내 젠더가 여러개일 수 있지 않냐는 버틀러의 주장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덮으면서 생각이 조금, 아주 조금 바뀌었다. 동성애자는 왜 당연히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이성애자의 허락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p>
<p> </p>
<p>재생산과 이성애를 너무나 당연하게 붙여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꼭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꼭 사랑과 같이 가야하는 것인가?  속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그사람을 꼭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니까 섹스파트너 관계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알고 있다. 쾌락이 삽입섹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나의 성적 쾌락은 혼자서도 혹은 동성의 사람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갑자기 나는 정말 시스젠더인가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동안 특별한 애착을 느꼈던 많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관계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하는 마음, 내 일상을 공유하고 그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런마음들과 그동안 연애했던 남자친구들에게 느꼈던 감정들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자인 친구들과 이성애 관계에서 하는 스킨쉽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스킨쉽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런건 없다!' 고 이미 학습해서 그런거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성애가 정말 강제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재생산을 편하게 하려면, 정자와 난자의 주인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시스젠더일까? 이성애가 자연스럽고 강제적인 사회에서 사는게 아니라면  그래서  애정관계가 성별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나는 혹시 양성애자일지도 모른다.  동성애자, 그러니까 버틀러가 원하는 것은 이성애자의 허락과 인정이 아니라. 섹슈얼리티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는 것일 것이다. </p>
<p> </p>
<p>그런 의미에서 강제적 이성애라는 견고한 구조에 돌을 던지는 전략, 패러디를 생각한 것이다.  그 예로 드랙을 든 것이고.  사실 버틀러의 전략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다.  그러나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의미화 경제 밖, 크리스테바가 말한 기호계의 웅얼거림이나 위티크가 말한 레즈비어니즘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밖에서 아무리 우리(?)끼리 얘기해봤자 돌을 깰 수 없다. 오히려  이성애는 없애버려야  할 적이 아니라  여러개 중의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계란으로라도 바위를 쳐야  그게 쪼개지고 작아지고 자갈돌이 된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젠더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난민, 장애인이 어떤 소수가 아니라 존재하는 여러 명 중의 한명이 되는 운동을 위한 힘이 될 것이다. </p>]]></description>
			<author><![CDATA[홍승희]]></author>
			<pubDate>Thu, 26 Sep 2024 20:55: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1"><![CDATA[강학원프로그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노년인권토크 in 서울]에 다녀왔습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8]]></link>
			<description><![CDATA[오늘은 홍대 KT&amp;G 상상마당에서 열린, &lt;노년인권토크&gt;에 다녀왔습니다.

어릴적 놀던 홍대, 주차장길을 아주 오랜만에 혼자 걸어보았습니다.

수노래방은 그자리에 아직 있었는데, 아니 왠 타로집이 그렇게도 많아요???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401aa39a8d8932493.png" alt="" />

노년인권토크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서울노인복지센터가 노인의 날을 맞아 개최한 행사로 서울과 수원에서 2회 열리는데요,

수원(10월 2일)에 앞서 열린 서울 행사에서는 영화 &lt;집으로 가는 길&gt;의 차은빈 감독, 정진웅 전 덕성여대교수, 최현숙 작가/활동가, 박종택 영화도슨트 네 분이 패널로 참여하고 씨네21의 이다혜기자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401a9a8fd97266644.jpeg" alt="" />

영화 &lt;집으로 가는 길&gt;은 2022년 작품으로 2023년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더라고요.

행사에 참여하신 분들의 대부분은 60대 이상으로 보였는데, 최현숙 작가님을 비롯하여 영화의 디테일이 뛰어나다는 칭찬이 많았습니다.

이다혜기자는 노년을 다루는 미디어의 시각이 보통 슬픔과 좌절의 분위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고 했고요.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401aa39e4d8782814.jpeg" alt="" />

&lt;집으로 가는 길&gt; 스틸컷

영화는 노년의 삶 중에서 주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좁은 아파트이지만 자유롭고, 친구들이 곁에 있고, 소소한 일거리로 돈도 벌면서 살고 있는 예화에게

어느날 갑자기 딸이 나타나 같이 살자고 합니다.

왜냐, 청약 당첨을 위해 점수를 높이기 위해 부모 돌봄 찬스를 쓰고 싶었던 것이죠.

영화는 이 사건 이후 벌어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었는데요,

영화를 본 후 노년의 주체성과 자기결정권이라는 주제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정진웅님

이 분은 평소 우리나라의 연령주의에 따른 노인 차별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었는데,

이 영화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청약)제도가 지금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효도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다며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국가가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최현숙님은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만약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면,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며
성별과 세대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노년 라이프스타일의 차이에 대해서도 짚어주셨어요.

마지막으로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감독과 패널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집이란 나만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확장되어 동네/커뮤니티로 연결될 수 있어야 진정한 집(주거)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주거환경에서 혼자 사는 노년의 삶은 ‘독거노인’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씌울 수 없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 된다는 최현식님의 말씀,

지배문화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나이듦, 서사의 주체성이 필요하다는 정진웅 님의 말씀은 나이듦연구소 연구원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시면 차은빈 감독의 &lt;집으로 가는 길&gt; 한 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다혜기자님 사진이 너무 이상하게 나와서 혹시 보신다면, 지못미 -.-;;)

총총총..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5156c5ccd72125265.jpeg" alt="" />

국가인권위에서 만든 책과 자료]]></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Wed, 25 Sep 2024 21:42: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CDATA[활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죽음탐구세미나] 시즌2 (미니) 에세이데이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46]]></link>
			<description><![CDATA[<p><strong><span style="font-size:20px;">‘죽음’을 읽고 삶이 새삼스럽다</span></strong></p>
<p> </p>
<p>마침내 가을!</p>
<p>어제까지 여름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가을이 되었다.</p>
<p>문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p>
<p>죽음탐구세미나 시즌2의 전반기가 끝났다. 이번에 공부한 책은 장켈레비치의 ‘죽음’이라는 700쪽짜리 책이었다.</p>
<p>마지막은 빼놓을 수 없는 에세이 발표 날, 늘 부담으로 와서 홀가분을 선사받는다. 역시 홀가분은 공짜로 느낄 수는 없나보다. 부담을 잔뜩 받고나서야 맛볼 수 있는 맛! 올해 무더위가 길더니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이 시원함처럼.</p>
<p>지지난 주 줌수업하고 지난 주 추석주라서 쉬고 3주만에 보는 샘들이 반갑다. 다들 간식 간단히 준비해 모였다.</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f12312327c33796383.jpg" alt="" /></p>
<p>서해샘은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모두 모였다. 문탁 선생님이 못오실줄 알았는데 오셔서 참 좋았다.</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f12377eef763257768.jpg" alt="" /></p>
<p>나란히 줄 서있는 글들을 보니 선생님들의 노고가 느껴진다. 저 글들을 낳느라 며칠 고생하셨을 것이다. 모두 수고하셨어요!</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f12387b94b32590853.jpg" alt="" /></p>
<p>경호샘이 먼저 발표를 하였다.</p>
<p>샘은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른 죽음에 대해서 가족의 사례를 들어 자세하고 솔직하게 얘기해 주셨다.</p>
<p>그름샘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는데 장켈레비치의 ‘했음’에 대한 설명으로 느낀 것이 많았음을,</p>
<p>윤경샘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일생이의 노화로 인한 고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를 장켈레비치의 책 내용과 연결시켜 주셨다.</p>
<p>인디언샘은 ‘좋은 죽음이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단식 존엄사’라는 책을 바탕으로 설명해주셔서 ‘좋은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특히 문탁샘이 단식으로 죽을 수 있으려면 죽기 오래 전부터 몸과 생활이 준비되어 있어야 가능하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었다.</p>
<p>송지샘은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모아서 소회를 적고, 죽는 순간에 바라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을 지적하였고, 그로 인해 웰다잉이 계속 상품화되어가고 있음을 토론하였다.</p>
<p>요요샘은 ‘죽음’이라는 책 내용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많이 언급됨에 따라 이 책을 독후감 형식으로 적어주셔서 늦게나마 ‘죽음’책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p>
<p>수현샘은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와 유한성 안에서 자유와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 저자는 죽음을 얘기하지만 삶을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p>
<p>기린샘은 ‘죽음이 우리의 연속적인 마비 상태를 뒤흔들어 놓는’ 것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다.</p>
<p>저는 평상시 삶을 냉소적으로, 인간을 가여운 존재로 여겨온 측면이 있었는데, 장켈레비치를 따라 삶을 ‘신비롭게’ 바라봐야겠다는 다짐을 적었다. 두 시선의 차이는 ‘겸손’과 ‘오만’이라는 마음결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p>
<p>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미나를 통해서 장켈레비치에게 위로 받은 것이 있다. 작년에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요즘까지 계속 개인은 무시(?)되고 영성이니 무상, 무아 등을 주문을 받으면서 틀린 말은 아닌데 몸에 큰 옷을 입은 양 불편했었는데 이번에 장켈레비치는 1인칭 죽음을 설명하면서 개인의 실존을 중요시 여겨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좀 풀렸다. 이제 다시 큰 옷을 입어도 그리 불편할 것 같진 않다.</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f123935fc1f1176167.jpg" alt="" /></p>
<p>에세이 발표 날, 하이라이트는 회식!</p>
<p>깐쇼새우를 비롯해 다양한 중국음식이 왔다. 사진을 처음에 찍어야하는데 먹느라 정신이 팔려 거의 먹고야 찍었다. 맛있게 실컷 먹었다. 먹으면서 세미나 시간보다 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요요샘과 기린샘의 일본 여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고, 그 밖에 다양한 사회현상, 특히 딥페이크의 심각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세대별 이야기(연탄 사용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의 고충, 정치 이야기, 또 우리들의 학습 주제,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p>
<p>역시 죽음 공부는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요 며칠 삶이 새삼스럽게 소중하다. 이런 기분은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잘보이는 책꽂이에 색깔도 예쁜 분홍색 ‘죽음’책을 꽂아두고 바라보면서, 문탁에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얘기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너 그때는 그랬잖아’라고 상기시켜주려 한다.</p>
<p>2주 후 더 깊어진 가을에 만나요!</p>]]></description>
			<author><![CDATA[니은]]></author>
			<pubDate>Mon, 23 Sep 2024 17:19: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2"><![CDATA[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의 기술, 첫번째 &lt;서예교실&gt;이 시작되었습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7]]></link>
			<description><![CDATA[일찌감치 마감되어~ 서예에 대한 관심을 확인하면서 기뻐하며~~ 개강을 기다린 &lt;서예교실&gt;

9월 23일 월요일 오후 2시 그 첫 시간이 문탁 2층 대강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12185db9ff4117204.jpg" alt="" width="389" height="292"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121e15fbb61474126.jpg" alt="" width="391" height="293" />

가로쓰기를 설명해 주시는 울타리선생님(한문강독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학이기도 한)의 설명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고 있는 새싹들의 열기^^ 느껴지시나요~

가로, 세로, 기역, 미음, 리을, 별... 등등 난생 처음 듣는

서예 용어 '역입'(붓을 글씨의 진행방향에서 역으로 꺾어서 시작) 의 방식을

계속 몸에 익히며 쓰는 시간이었습니다. 붓을 세워서 가지런히 모아 진행방향으로 붓을 눕히며 죽~~

말은 쉽지만 몸에 익히자면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초딩이 쓰는 것 같다... 옛날에 써 본 솜씨 나온다...왜 선생님처럼 안 되지... 서서 쓰는게 더 잘된다..

그리고 있다... 어깨 아프다.. 허리 아프다 등등 초보자들의 애환이 담긴 궁시렁이 끊이지 않는 첫 시간^^

그래도 선생님의 지도 아래 열심히 두 시간을 쓰고 나니, 온 몸이 뻑적지근 하네요.

그래도 첫 시간에 연습한 구력으로 써보는 한 일 자(一)

<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f1238f82b579082613.jpg" alt="" width="658" height="493" />

첫 시간의 연습으로 만든 글씨, 어떠세요?

앞으로 10주간 서예의 초심자 11명이 습득해볼 나이듦의 기술로서의 서예가 어떤 감응을 불러올지 기대해 봅니다^^

첫 시간을 함께 시작한 동학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img class="aligncenter" src="https://test.trendcube.co.kr/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202410/66fbeea5a6e7e1776977.jpg" alt="" width="786" height="590" />]]></description>
			<author><![CDATA[나이듦]]></author>
			<pubDate>Mon, 23 Sep 2024 17:18: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CDATA[활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개념탐구 공지3-7&gt; 젠더 트러블 -마지막 세미나]]></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00]]></link>
			<description><![CDATA[<p>추석은 잘 보내셨습니까?</p>
<p>갑자기 하늘이 맑아지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살 만해지니까... 음.... 이거 거짓말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p>
<p>아직, 여름 옷, 이불, 선풍기 그냥 두려고 합니다. ㅎㅎ</p>
<p> </p>
<p>드뎌  &lt;젠더 트러블&gt; 마지막이네요.</p>
<p>이번에는 모니크 위티크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드랙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권력 안에서 권력을 비틀 수 있는 방법이겠죠.</p>
<p>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0c12cd65142296254.jpg" alt=""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0c0df447ee9893399.jpg" al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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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 </p>
<p>"보봐르와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 의미화하는 방식, 혹은 그 반대 방식을 고찰하지만 둘 다 성별 분석이 암묵적으로 이성애의 이분법으로 조직되는 방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대로, 위띠그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화체계는 전부 그가 '이성애적 경제'라 명명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띠그도 이리가레처럼 성별 범주가 순전히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이성애적 사고체계와 이성애적 경계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구성물이라고도 주장한다. 위띠그는 '사회를 이성애적으로 세우는 정치적 범주'로 성을 정의하면서, 남자가 여자를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위띠그는 성별이 이성애적 관점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린다. 레즈비언은 그 용어에 의미를 주는 경제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p>
<p>위띠그에게 여성의 위상을 바꿀 유일할 가능성은 성별 체계를 제거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식기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는 형성되지 않는 다형적 섹슈얼리티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레즈비언은 남자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성의 경제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레즈비언에는 '대안적 쾌락 경제'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마르크시스트인) 위띠그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결부된 경제로 본다. 이처럼 레즈비언은 성별 체계를 전복할 가능성 뿐 아니라 수단도 보여준다. 강제적 이성애의 불평등이 은연중 깔리지 않은 성별체계의 내부는 없으므로, 위띠그가 보기에 성별과 관련해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버틀러 말대로 '(a)철저한 순응 아니면 (b) 철저한 혁명' 뿐이다." (&lt;쉽게 읽는 주디스 버틀러&gt; p73)</p>
<p> </p>
<p> </p>
<p>"드래그가 '여성'에 대한 하나의 통일된 그림을 창조해내는 만큼 그것은 또한 이성애적 일관성이라는 규제적 허구를 통해 통일체인 양 거짓되게 당연시된 이런 분명한 양상의 젠더 경험을 폭로한다. 드래그는 젠더를 모방하면서 은연중에 젠더 자체의 우연성뿐 아니라 모방적인 구조도 드러낸다." (&lt;젠더트러블&gt;, p343)</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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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6/202409/66f0c4783472a7144592.jpg" alt="" /></p>
<p> </p>
<p>*드랙관련 더 읽을 거리</p>
<p><a href="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902244.html">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902244.html</a></p>
<p><a href="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906010600055#c2b">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906010600055#c2b</a></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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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다음주는 버틀러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p>
<p>제가 권해드리는 팁은 우리가 읽었던, 아니타 브랜디&amp;토니 쉬라토의 &lt;쉽게 읽는 주디스 버틀러&gt;의 1,2장을 다시 읽어보는 것입니다. 이제 완전 잘 읽힐 거에요. ㅎㅎㅎ</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Mon, 23 Sep 2024 10:2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1"><![CDATA[강학원프로그램]]></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리뷰28] 좋은 죽음 수업 -&lt;단식 존엄사&gt;]]></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9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d5350473127673454.jpg" al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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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strong>단식을 통한 존엄사가 가능하다</strong></p>
<p> </p>
<p>『단식 존엄사』는 대만에서 ‘소뇌실조증’이라는 유전성 희귀병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83살 때 ‘단식 존엄사’를 결단하자 재활학과 의사인 딸 비류잉이 어머니가 임종할 때까지 옆에서 함께하며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p>
<p> </p>
<p>‘소뇌실조증’은 운동을 조절하는 소뇌가 점차 기능을 상실해 균형 감각이 떨어져 잘 넘어지고 말기에는 걷지 못하고 침상 생활을 하게 되며 팔다리가 굳어져서 비위관을 삽입해야 한다. 유전병인 이 병은 부모 중 한 사람이 걸리면 자녀가 2분의 1 확률로 걸리는데, 이미 저자의 삼촌과 사촌 오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60대에 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고 다행히 자녀들에게는 유전되지 않았다.</p>
<p> </p>
<p>저자의 어머니는 권위적인 남편과 함께 희생적인 삶을 살았지만 강인한 성격으로 자신의 죽음을 결단한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안락사나 존엄사가 합법적이지 않고 유명한 방송인이 스위스로 가서 존엄사를 한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내가 살아있는 의미가 없어지면 떠날 수 있게 도와줘.”라고 여러 번 강조했고 사전연명의료서에 서명하고 건강보험에도 등록해두었다.</p>
<p>평소 요가를 열심히 하고 마음도 강건했던 저자의 어머니는 소뇌실조증 확진을 받은 후에도 변함없이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중풍에 걸린 남편을 보살피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가족들과 외국 여행도 다닌다. 확진 후 20년 정도 지나 몸 상태가 나빠지자 외국인 간병인의 도움을 받게 되고 83살이 되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다가 사레가 들리는 등 증상이 악화됐다. 어머니는 ‘단식 존엄사’를 결단하고, 그 시기까지 자신이 정한다. 그동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하는 삼남매와 가족들은 어머니의 뜻을 존중한다.</p>
<p> </p>
<p>저자는 단식을 시작한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21일간의 단식 방법과 그날그날의 상태를 기록하고, 문제점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기록을 남긴다.</p>
<p>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생전 장례식’을 치른다. 손주가 할머니를 인터뷰하여 자신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하고, 그동안의 사진들을 모아 영상을 만들어 함께 보면서 행복했던 추억을 공유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나 남편에게 남아있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가족들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 존경, 감사, 미안함 등의 마음을 표현한다. 멀리 사는 손주나 증손주들도 찾아와 이별을 하고 어머니는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당부도 한다.</p>
<p>“아주 만족스럽다! 난 훌훌 떠날 테니 울지 말거라.”</p>
<p> </p>
<p> </p>
<p><strong>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질문</strong></p>
<p> </p>
<p>저자는 어머니의 삶과 단식존엄사의 과정 뿐 만아니라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과 가족들의 관계, 의료계나 의사의 역할과 한계, 간병과 돌봄, 호스피스 완화의료,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장례식문화, 대만의 존엄사 입법 역사 등을 함께 쓰고 있다.</p>
<p> </p>
<p>특히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어머니가 병환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보여준 낙관적인 의지, 죽음을 흔쾌히 마주한 용기와 지혜, 단신 존엄사의 과정과 가족의 응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단식 존엄사는 어찌하지 못하던 와중에 찾아낸 방법으로, 존엄사 입법이 시급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득하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사명으로 나는 미약한 힘을 발휘해 더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다.”(229쪽)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p>
<p> </p>
<p>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은 대만 내에서 존엄사 입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안락사나 의료조력 사망이 합법화되지 않은 국가는 아직도 많다. 우리나라는 존엄사와 관련된 법안이 2022년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처리되지 못하고 회기가 끝나 2024년에 폐기되었다. 존엄사가 합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저자.</p>
<p> </p>
<p>‘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다.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로 거의 10년 가까이 더 살아야 하는 현 시점에서 존엄사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병원에서 사망 직전에 하는 심폐소생술, 기도삽관, 강심제 투여 같은 것들에 대해 의사들도 가혹한 ‘사망 세트 형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196쪽). 코로 관을 연결해 영양을 공급하고, 도뇨관으로 소변을 빼내고, 기도 삽관을 하며 연명하다가 전기충격기에 갈비뼈가 부러진 채 임종하는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료진들은 스스로 ‘의료사’ 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사망은 의사로서의 실패’ 라거나 ‘환자를 구하는 소명의식’ 혹은 ‘법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마지막 가는 환자에게 형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나카무라 진이치의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신유희 옮김, 위즈덤스타일, 2012)는 책을 많이 인용하며 대만과 일본이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p>
<p> </p>
<p>책을 읽는 내낸 치매와 파킨슨증으로 팔다리가 점점 굳어가고 이제 음식을 삼키는 것도 힘들어하는 엄마를 생각했다. 머지않아 인공영양공급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할텐데... 엄마의 증상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대상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대만보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대상 범위가 훨씬 좁다. 앞으로 닥쳐올 멀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엄마를 고통에 빠트리지 않고 조금이나마 편안한 상태로 잘 보내드릴 수 있을까.</p>
<p> </p>
<p>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d4c1e6c1561355603.jpeg" alt="66ed4c1e6c1561355603.jpeg" /></p>
<p> </p>
<p> </p>
<p>구시대 여인인 어머니가 신시대적 사고로 자신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결정했기 때문에 21일간 가족들이 따뜻하게 동행할 수 있었다. 아쉬움과 이별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일은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모두 잘 지내기 위함이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누구도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이다.(162쪽)</p>
<p> </p>
<p>우리로서는 어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마지막 레슨을 해주신 것 같았다. 죽음은 이처럼 평온할 수 있기에 미지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그래서 살아 있는 시간을 소중히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후회 없이 용감하게 죽음을 마주하게끔 했다.(163쪽)</p>
<p> </p>
<p> </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8/66c0c27d8a3292377008.jpg" alt="66c0c27d8a3292377008.jpg" /></p>
<p> </p>
<p>'좋은 죽음'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p>
<p> </p>
<p> </p>
<ul>
	<li>섬네일에 뜬 사진은 이 책의 주인공인 비류잉의 어머니가 증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입니다.</li>
</ul>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Fri, 20 Sep 2024 19:15: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6"><![CDATA[나이듦을 읽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죽음탐구세미나]미니에세이 올려주세요~]]></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45]]></link>
			<description><![CDATA[<p> </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ed3ddd489729865058.jpg" alt="" width="703" height="527" /></p>
<p> </p>
<p>추석연휴를 끼고 일주일 시코쿠 순례 다녀왔습니다!! 좀 전에 돌아 왔어요.</p>
<p>시코쿠 순례는 절에서 절로 88개 절을 도는 수행인데요, 저는 18개 절을 돌고 왔어요.</p>
<p>걷는 동안 마을 곳곳에서 그리고 절 가까이에서 정말 많은 공동묘지를 만났답니다.</p>
<p>석탑묘가 모여있는 공동묘지를 지날 때마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p>
<p> </p>
<p>미니에세이 작업은 잘 되고 계신가요?</p>
<p>글이 완성되는대로 올려주시고, 10부 복사해 오시면 됩니다.^^</p>
<p>내일 문탁에 와서 프린트하실 분들은 좀 일찍 오시면 되겠습니다.</p>
<p> </p>
<p>각자 조금씩 간식 준비해주시고, 에세이 마친 후 함께 저녁 먹으며 조촐한 뒤풀이 하려 하니 시간비워주세요.</p>
<p> </p>
<p>내일 뵙겠습니다!!</p>]]></description>
			<author><![CDATA[요요]]></author>
			<pubDate>Fri, 20 Sep 2024 18:23: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2"><![CDATA[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4회 - 마지막 여행의 장소, 호스피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8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96ad9cad4f3958983.jpg" alt="" /></p>
<p> </p>
<p>우리나라의 건강수명을 고려하면 보통 66세부터 83세까지,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약해지면서 고혈압, 당뇨, 뇌졸중, 폐렴 또는 낙상에 의한 골절로 병원신세를 진다. 이러한 병이나 장애로 자립이 어려워지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한다. 요양시설에서 지내다 보면 폐렴, 요로감염, 갑작스런 뇌경색이 일어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면 요양시설에서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환자를 이송시키고 병원에서는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회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사망하는 노인이 더 많다. 또한 회복되더라도 이전보다 더 쇠약해진 상태로 요양시설로 돌아간 노인들은 발열, 호흡곤란, 의식저하 등의 이유로 종합병원 응급실을 다시 찾는다. 결국 이렇게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을 떠돌다가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박중철의 &lt;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gt;(2022, 199쪽)에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최빈도 죽음의 현장이다. 우리나라는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이 70%(2023년 기준)라고 한다(외상환자 제외).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생애 말기 돌봄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애 말기 돌봄의 질은 곧 존엄한 삶의 마무리와 직결된다.</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96fccd30f69352040.jpg" alt="" width="801" height="534" /></p>
<p> </p>
<p><strong>생애 마지막 돌봄, 호스피스</strong></p>
<p> </p>
<p><br />
내가 호스피스를 경험하게 된 것은 7년 전 시어머니의 암투병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소변에 피가 보이는 증상으로 동네 비뇨기과를 찾았는데 의사가 큰 병원에서의 진료를 권했다. 신장암이었다. 발병 후 힘든 항암치료가 시작되었고 요양을 위해 지방으로 이사도 하셨다. 기존 항암치료에 한방요법도 해보고 대체요법도 알아봤지만 차도는 없었다. 1년새에 병세는 점점 나빠졌고 암이 전이되면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셨다. 지인의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통증관리를 받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남편에게 호스피스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그때 남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요양병원도 아닌 호스피스로 모신다는 것은 곧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당시에도 호스피스는 죽음의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럼에도 고민 끝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시립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p>
<p> </p>
<p>기억에 남는 것은 호스피스 입실 전, 담당 수간호사가 가족들을 모아놓고 호스피스 의료와 보호자의 주의사항 대해 설명해 주었던 순간이다. 어머니에게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건네라는 것, 싸우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가족들의 감정 컨트롤이 필요하다는 것, 마지막까지 귀가 열려있으니 돌아가시더라도 너무 크게 울거나 슬퍼하지 말고 어머니가 잘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당부와 함께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수간호사는 전문적이면서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어서 안심이 되었다.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 머문 기간은 2주 정도였다. 가족들은 순번을 정해 어머니를 지켰다. 그리고 어머니가 떠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임종실로 이동했다. ‘햇살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어머니는 친척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 처음에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던 남편은 어머니의 임종을 조용히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와 도움을 준 지인에게 고마워했다.</p>
<p> </p>
<p>2016년 12월 방영된 KBS스페셜&lt;서진아 엄마는&gt;에서는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후 2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김정화씨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얻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에 문제가 있어 마음고생을 많았던 정화씨는 자신의 아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의연했지만 서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일곱 살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을 보는 것과 초등학교 생활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해 여름, 안타깝게도 암이 악화되어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주치의로부터 여생이 3개월 남짓이라는 말을 듣고 정화씨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2016년부터 시범운영된 가정형 호스피스를 선택했다. 종합병원의 암센터가 아닌 호스피스병원에서 가정형 호스피스 상담을 받은 후 정기적인 의료진의 방문을 통해 통증관리와 심리적 돌봄을 받았다. 그가 집에 머물 수 있었던 시간은 16일밖에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시간은 소중했다. 직접 아이를 씻기고 등하원시킬수는 없어도 아이와 스킨십을 할 수 있었고 함께 동화책을 읽으며 웃을 수 있었다. 정화씨는 ‘일상 속에 머물며 식구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임종기에 다다랐을 때, 집을 떠나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3일간의 임종기를 거쳐 숨을 거두었다. 역시 가족들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들이었다.</p>
<p> </p>
<p>입원형, 가정형에 이어 2017년부터는 자문형 호스피스 사업이 시범사업으로 시작됐다. 호스피스 대상 질환군(말기 암 외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에 속한 환자가 일반 병동 입원이나 통원으로 기존 주치의 진료를 받으면서 완화의료팀의 돌봄을 같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암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었던 환자에게 항암치료가 더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환자의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선택할 수 있다. 원내의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로 구성된 완화의료팀은 주치의와의 협업을 유지하며 환자와 환자가족을 위한 돌봄 계획을 수립한다. 여기에는 통증이나 신체적인 증상 완화는 물론 음악/미술 치유요법, 임종관리 환자가족의 돌봄 교육도 포함된다. 자문형 호스피스 서비스는 타병원으로 전원이 아닌 기존에 진료를 받던 병원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의료전에 대한 신뢰가 장점으로 꼽힌다. 자문형 호스피스를 받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면 입원형이나 가정형 호스피스로 전환이 가능하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96b0c3335d8107017.jpg" alt="" width="843" height="1111" /></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4px;"> 자료 : <span class="s1">2023 </span>국가 호스피스 완화의료 연례보고서</span></p>
<p> </p>
<p><strong>필요성은 느끼지만, 아직 정착되지 못한 호스피스</strong></p>
<p> </p>
<p><br />
호스피스(hospice)라는 용어는 hospital, hostel, hotel 등과 같은 라틴어의 어원에서 유래했다. 어원은 hospes(손님) 또는 hospitum(손님 접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으로 호스피스는 원래 중세 유럽에서 여행 순례자에게 숙박을 제공했던 작은 교회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런 여행자가 병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는 경우, 그대로 그 곳에서 치료 및 간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수용시설 전반을 호스피스라고 부르게 되었다.</p>
<p>우리나라의 호스피스는 1965년 호주의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서 온 수녀들이 만든 가정 호스피스 갈바리 의원이 그 효시이다. 시작은 호스피스 종주국인 영국에 비해서도 늦지 않았으나 발전과정은 전후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매우 더딘 편이었다. 일부 의사들에 의해 연구모임으로 진행되다가 1988년 강남성모병원에 14개의 병상을 갖춘 최초의 호스피스병동이 설립되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체계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2018년에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이 법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와 연명의료중단결정 등 그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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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법에 근거해 치료로 더 이상의 회복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는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고,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는 질환의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입원형, 가정형, 자문형 호스피스가 운영되고 있으며 소아청소년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입원형 호스피스 기관은 106개(요양병원 포함), 가정형 39개, 자문형 42개소이다. 병상수로 따지면 1800개 정도로 호스피스 이용률은 약 25% 정도에 머문다. 매년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 네 명중 한 명만 호스피스를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영국의 95%, 미국과 대만의 50~6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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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96b0843bb07142929.png" alt="" width="765" height="606" /></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4px;">자료 : <span class="s1">2023 </span>국가 호스피스 완화의료 연례보고서</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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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호스피스의 이용률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스피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lt;2023 국가호스피스 완화의료 연례보고서&gt;에 따르면, 사람들은 호스피스의 역할에 대해 ‘통증 및 정신적 완화’나 ‘환자 및 보호자의 삶의 질 개선’보다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위한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다. 호스피스를 생각하면 죽음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호스피스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 또한 호스피스를 이용할 때 건강보험적용이 되는지를 모른다. 건강보험 적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64%로 아직 제도에 대한 홍보가 부족한 현실이다. 두 번째는 호스피스 기관수 통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관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호스피스 입원 병동은 주로 종교단체 의료재단이나 공공병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대규모의 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상급 종합병원에서는 대부분 호스피스병동을 두고 있지 않다. 고가의 장비와 약물을 사용하는 치료의 영역에 대해서는 서로 경쟁하지만, 돌봄에 더 무게가 실리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 대신 자문형 호스피스를 시범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입원형 호스피스병원으로 전원해야 하는 말기 상황에서 환자들은 갈 곳이 없다. 때문에 입소를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들도 많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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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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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 />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쓴 책 &lt;천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gt;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비슷한 나이의 중년 여성이 A와 B가 위암에 걸려 암 수술을 했다. 두 사람은 항암치료 중 서로를 알게 되었다. 둘 다 완치된 줄 알았으나 야속하게도 암세포가 전이되어 비슷한 시기에 말기 암 환자가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기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A는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에서 통증을 조절한 후 가족여행을 떠나는 등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반면 B는 끝까지 적극적 치료를 하다가 임종 단계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누구에게도 이별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 번이 넘는 죽음을 맞닥뜨린 김여환은 만약 B나 그의 가족들이 호스피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그녀의 마지막은 덜 힘겨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알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죽음의 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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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96afbd674e1018478.jpg" alt="" width="720" height="48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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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에 발표된 제2차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안)에는 2028년까지 호스피스 이용률을 5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대상 질환도 확대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는 내용은 이것이다. ‘노년기뿐 아니라 학령기, 성인기, 중장년기 등 연령별 교육과정 개설·확산을 통해 생애말기 자기결정 등에 대해 미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불확실하면서 당연한 것이다. 의료기술은 불확실성을 이용해 불필요한 기대를 만들기도 한다. 기대를 접고 당연함을 받아들여야 할 때를 잘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존엄하게, 평화롭게,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죽음과 말기 돌봄에 대해 미리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p>
<p>나 역시 다시 다짐해 본다. 좋은 시체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죽음이 먼저다.</p>
<p> </p>
<p><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color:#000080;">죽음의 맨 얼굴을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span><br />
<span style="color:#333399;">(&lt;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gt;, 김여환, 2021)</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Tue, 17 Sep 2024 21:03: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6"><![CDATA[나이듦을 읽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인디언5회&gt; 나는 엄마를 돌보고 있는 걸까?]]></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27]]></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0/202409/66e588344dc579365391.jpg" alt=""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0/202409/66e669e717a232622372.jpg" alt="" /></p>
<p> </p>
<p> </p>
<p>엄마가 침대에서 누워 지낸지 석 달이 지났다. 꼬리뼈 쪽 욕창은 다행히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귓바퀴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친구 엄마가 욕창으로 수술까지 하는 것을 봤던 나는 욕창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가정간호서비스를 신청했고 간호사가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욕창치료를 해주었지만, 간호사들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욕창치료는 내 몫이었다. 다만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정도의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식사준비나 시중, 배변 문제 까지는 집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가 있지만, 엄마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계속 나빠지는 상황에서 그냥 처방약만 드시게 하면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지 불안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엄마를 위한 것인지 매일 매일 고민이 깊어갔다.</p>
<p> </p>
<p><strong>요양병원으로</strong></p>
<p> </p>
<p>가족회의를 했다. 새언니가 아는 요양보호사가 ‘00병원이 욕창 치료를 가장 잘 한다’고 했다며 요양병원을 한번 알아보면 어떠냐고 해서 남편과 함께 그 병원을 방문했다. 의사를 기다려서 상담을 했는데, 욕창에 대한 자신감은 컸지만 재활프로그램도 별로 없고, 간병인 한 명이 환자 4~6명을 돌본다고 했다. 엄마는 욕창도 문제지만 재활이 필요하고 간병인이 거의 24시간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집에서 차로 40여분 이상 걸리는 거리도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결정하면 입원은 가능했고 새언니는 욕창 치료를 위해 입원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p>
<p>어쨌거나 길게 보면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평판이 좋은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 의사가 여러 명 있고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 엄마가 입원하면 욕창뿐만 아니라 굳어가는 근육을 위한 재활치료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엄마랑 비슷한 수준의 환자가 6명 있는 병실에 3명의 간병인이 함께 돌본다고 했다. 시설이나 분위기도 밝고 따뜻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엄마의 진료기록들을 갖고 가서 상담간호사와 상담을 했다. 입원할 수 있는 조건은 되는데 당장은 병실이 없었다. 바로 엄마를 입원시킬 생각은 아니어서 대기접수를 하고 돌아왔다.</p>
<p> </p>
<p>한 달쯤 지나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병실이 났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오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된 건 아니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은 미룰 수가 없었다. 엄마의 의사를 물어봤지만 엄마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가 병원이냐?”고 묻기도 하고, “엄마 여기 어딘지 아세요?” 하면 “병원”이라고 답하시기도 했다. 가족들과 나는 당장 욕창치료가 급하고 무릎 재활도 필요하니 우선은 입원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엄마가 싫다고 하면 언제든지 퇴원을 하면 되니까... 입원을 하기로 했다.</p>
<p> </p>
<p>엄마는 PCR검사로 코로나 음성이 확인되어야 병실 입원이 가능했다. 병원에 가서 PCR검사를 하고 1인실에 하루 동안 있으면서 결과를 기다렸다가 음성이 확인되면 입원할 수 있다고. 그 하루 동안은 간병인이 돌볼 수 없어서 보호자가 필요했고, 보호자도 코로나 음성확인서가 필요했다. 나는 내과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했고 음성확인서를 받았다. 이것저것 간단히 준비하고 남편과 아들의 도움을 받아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실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했지만 엄마는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아니, 말씀을 잘 못하셨다. 다만 그런대로 밝은 엄마의 표정을 스스로 위안 삼았다.</p>
<p> </p>
<p><strong>환자와 보호자</strong></p>
<p> </p>
<p>내가 직접 병원에 가볼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엄마가 입원할 병실을 포함해 병원을 이리 저리 살펴볼 수 있었고 사람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담당 간호사는 밝은 표정에 아주 친절했다. 엄마한테는 간호사가 중요한데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간호사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담당 의사가 왔다. 엄마는 의사에게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내 판단이지만... 의사는 엄마의 상태를 설명하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병원에서 받게 될 재활치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본인이 보기에도 엄마는 루이소체치매가 맞는 것 같다고 했고 파킨슨증이 많이 진행되어서 팔 다리 재활과 함께 연하장애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재활치료도 필요하다고 했다. 파킨슨증이 더 진행되면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데 필요한 근육들도 굳어지기 때문에 연하장애와 관련된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입원하기를 잘 했다는 마음이 들면서 망설였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p>
<p>이번에는 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관리자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간병비용 등 보호자가 알아야할 간병서비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사인을 받아갔다. 병실로 전화해서 통화는 가능하지만 간병인과 개별적인 접촉은 하면 안 되고 환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은 간호사실과 소통하라고 했다. 엄마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사람이 간병인인데 이들과 소통하지 말라는 것은 뭐지?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 간병인이라는 위치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들은 병원 안에서 환자에게 가장 밀착해서 직접적으로 꼭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지만 그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병원외부의 시스템이다. 병원진료와 관계된 비용은 병원에 지불하지만 간병비는 간병서비스업체의 계좌로 보낸다. 환자나 보호자는 결국 각각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p>
<p>다음날 엄마는 코로나 음성이 확인되고 병실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를 그렇게 두고 병원을 나왔다. 의료 시스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병인들에게 엄마를 맡기고...</p>
<p> </p>
<p>이삼일 동안은 병원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휠체어가 필요하다. 실내화가 불편하다. 이러저러한 형태의 스카프가 있으면 좋겠다. 다리를 고정시킬 수 있는 띠가 필요하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병원에 전달했다. 병원 입구에는 택배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아마 멀리 사는 보호자들은 택배로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제 엄마가 병원에 계신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엄마는 환자, 나는 보호자가 되었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0/202409/66e669f07207b4830546.jpg" alt="" width="398" height="362" />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0/202409/66e669fa237541327504.jpg" alt="" width="345" height="361" /></p>
<p> </p>
<p> </p>
<p><strong>엄마는 좋아지고 있을까</strong></p>
<p> </p>
<p>온 식구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엄마는 코로나를 잘 피해갔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한 후 석달쯤 지나서 엄마가 코로나에 걸렸다. 1인실에 격리되어 치료를 받았고 증세가 심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병실로 돌아온 후 일주일쯤 지나서 열이 나고 식사를 잘 못하셔서 애를 태웠다. 옆에서 직접 보지 못하고 상태를 전해 듣기만 하니 답답하고 더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코로나 후유증 같은데 집에서도 걸리지 않은 코로나를 병원에서 걸리다니 화도 나고 속상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매일 의사와 통화하고 상태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2~3일 지나서 열도 내리고 식사도 잘 하시게 되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p>
<p>면회를 간 어느 날은 엄마가 간호사실 옆 처치실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계셨다. 염증수치가 높아져서 24시간 항생제를 주사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 엄마는 가끔 미열이 나고 염증수치가 높아진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그때그때 증상에 대응할 뿐이다. 해열제나 항생제를 처방하고 며칠 후에 다시 검사해서 수치를 확인하고...</p>
<p> </p>
<p>다행히 욕창은 깨끗하게 나았다. 양쪽 귓바퀴의 상처도 다 나았고 다른 곳에 욕창이 새로 생기지도 않았다. 무릎과 손은 재활치료를 하지만 점점 더 굳어져가는 것 같다. 손을 잡으면 힘을 주기는 하시는데 마음대로 손이 펴지지는 않는 것 같고, 다리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신다. 의사는 고민을 많이 했고 파킨슨 약을 조금 늘렸다고 했다. 의사의 관심은 이제 인지문제보다는 육체적인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의사를 만나면 몸무게가 늘었다고 좋아하거나 줄었다고 걱정하곤 했다. 나는 의사가 하는 대로 지켜볼 뿐, 의사에게 의견을 낼 수도 없다. 아는 게 없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자기에게 웃어줬다거나 대답을 했다거나 하는 표현에서 세심하게 엄마를 살피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는 한다. 입원 한 지 6개월 쯤 지났을 때 입원할 당시와 비교해 엄마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의사는 많이 나빠지지는 않았고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p>
<p> </p>
<p>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것이 집에서 돌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이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엄마를 돌보고 있는 걸까? 엄마는 환자가 되었고 나는 보호자일 뿐인데...</p>
<p> </p>
<p><strong>엄마의 무표정</strong></p>
<p> </p>
<p>내 핸드폰은 토요일 아침 8시 58분에 알람이 울린다. 엄마 면회 예약을 위해서다. 9시부터 예약 페이지가 열리는데 주말 예약은 빨리 해야 해서 거의 오픈런이다. 2주 후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입원 후 한동안은 일주일에 한번 로비층 면회실에서만 면회가 가능했다. 코로나 음성 키트를 제시하고 4명까지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은 30분. 가족 톡에 일정을 올리고 면회 갈 사람을 조직하는 일이 내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3일에 한 번씩 면회가 가능하다. 코로나 검사는 하지 않아도 되고 병실 옆 휴게실에서 엄마를 만난다. 엄마랑 병원 정원으로 나가 산책을 할 수도 있다. 평일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예약이 그리 어렵지 않다. 수요일과 토요일을 면회일로 정하고 수요일은 주로 나와 남편이 면회를 간다.</p>
<p>면회를 갈 때는 엄마가 드실 수 있게 부드러운 과일을 잘게 잘라간다. 면회 시간에 엄마가 과일을 잘 드시면 좀 안심이 되고 잘 안 드시면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걱정이 된다. 병실에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소모품을 문자로 알려주고 나는 면회 갈 때 그것들을 챙겨다 준다.</p>
<p> </p>
<p>엄마는 멀리서 온 손녀에게 “뭐 하러 왔냐”고 할 때도 있고, 증손주를 보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이쁘다”고 할 때도 있었다. 사촌 동생들이나 내 친구가 왔을 때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보여드리며 “00이예요” 라고 이름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엄마가 사람들을 알아보는지 어떤지 매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00 왔어요. 00 알죠?” 하면 어떤 날은 베시시 웃으며 ‘내가 그걸 모를까’하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엄마의 표정, 엄마의 대답여부가 나의 희비를 결정한다.</p>
<p> </p>
<p>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해졌다. 물어도 대답을 듣기가 어렵고 어쩌다 한마디 말씀을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러 번 물어보면 힘주어 “응”이라고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알아듣기는 하시는구나 생각한다. 아마도 말하는데 관련된 근육도 점점 굳어져 가는 것 같고 그래서 말하기가 힘드신가보다.</p>
<p> </p>
<p>목요일 오전에 의사가 전화를 했다. 엄마가 사과를 드시다가 목에 걸려서 석션으로 빼냈다고 했다. 깜짝 놀라는 내게 의사는 찬찬히 설명을 했다. 연하장애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다행히 작은 조각이라 작은 기구를 썼고 별 문제는 없었다면서,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래도 걱정이 돼서 엄마를 한번 보고 오려고 병실에 전화를 했더니 간호사실에서 허락하면 모시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엑스레이도 찍어봤는데 괜찮으시고 지금 점심식사도 하고 있으니 그냥 쉬게 해드리는 게 좋겠다고, 토요일 면회 잡혀 있으니 그때 오라고 한다. 답답하지만 보호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p>
<p> </p>
<p>엄마 생각을 한다. 무표정한 엄마가 보인다. 엄마의 무표정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것이 파킨슨증의 주요 증상이라는 것을 알아도 무표정하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 나는 마구 흔들린다. 엄마가 마치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나를 돌본다면서 지금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냐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어디 있느냐고. 나는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점점 납작해지고 희미해져 가고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p>
<p>가끔은 엄마를 집으로 다시 모셔올까 이런 생각도 한다. 엄마가 혹시 집에 오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집으로 모셔 와서 더 좋아질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증손주를 데려가 한번 이라도 더 웃게 해드리는 것이나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을 잘게 다져가 입에 넣어드리는 것(이제 이것도 힘들어졌다!) 말고, 의사나 간호사, 간병인에게 엄마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Sat, 14 Sep 2024 22:08: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2"><![CDATA[K장녀돌봄 말하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리뷰27] 지워진, 그러나 지울 수 없는 흔적 -&lt;주름&gt;]]></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8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4e9ef7af8c5891163.jpg" alt="" /></p>
<p> </p>
<p><strong>젊은 작가의 치매 노인 관찰기</strong></p>
<p> </p>
<p>“거울 속 당신의 모습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느껴진다면 이제 당신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이겠지요. 거울 속 제 모습이 아버지를 꼭 닮아 갑니다. 또 아버지에게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작가의 말)<br />
스페인의 그래픽노블 작가인 파코 로카는 평소 사회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친구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듣고, 자존심 강한 자신의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참고 지팡이를 구입하는 것을 보며 노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p>
<p>당시 38세의 작가에게 알츠하이머는 어떻게 보였을까.</p>
<p> </p>
<p>“더 이상은 못 참겠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br />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아들을 대출받으러 온 고객으로 착각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소리친다. 아버지의 기행을 견디다 못한 아들 부부는 아버지 에밀리오를 요양원으로 보낸다. 하지만 에밀리오는 자신이 왜 요양원에 가야하는 지 아직 깨닫지 못한다.<br />
낯선 요양원에서 마치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리는 에밀리오. 그에게 다가온 룸메이트 미겔은 요양원의 거동이 가능한 환자 모두를 잘 알고 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그는 에밀리오에게 능숙하게 요양원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자식들이 자신을 못 찾고 있으니 전화를 걸어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전화를 걸러 가는 사이 자신의 할 일을 잊어버리는 노인, 오리엔트특급 열차를 타고 여행 중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노인, 자신의 메달을 자랑스러워하는 전 육상선수, 귀는 멀었지만 촉각은 살아 있어 성추행을 일삼는 노인, 기억을 잃어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을 돌보기 위해 함께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부인, 자신의 말 대신 반향어 밖에 할 줄 모르게 되어버린 전직 아나운서 등등. 각자 다른 현재를 살고 있지만, 각자의 정체성만은 여전히 뚜렷한 사람들이다.</p>
<p>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하고, 특정한 시공간에만 머물기도 하고, 난데없는 망상에 빠져있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흘러간 과거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p>
<p> </p>
<p><strong>지워진 기억위에 쌓이는 존재의 긍정성</strong></p>
<p> </p>
<p><br />
요양원 시설은 거동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있는 환자들이 모여있는 1층과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2층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1층 환자들에게 2층은 공포의 대상이자 기피의 대상이다. <br />
자신은 그저 건망증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일상을 보내던 에밀리오는 어느날 심각한 치매환자와 자기의 약이 같은 성분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언젠가 2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를 지켜주는 것은 바로 룸메이트 미겔이다. 가족이 없으며 요양원에서 정신이 가장 멀쩡한 그는 다른 노인들의 용돈을 슬금슬금 갈취하는 삐끼처럼 보이지만 실은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는 존재이다.</p>
<p> </p>
<p>요양원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계획을 짤 수 있는 사람도 미겔 뿐이다. 그가 평소 입소 노인들에게 뜯어낸 돈을 모아 벌인 일탈은 꽤나 스케일이 크다. 요양원의 절친 둘과 함께 스포츠카를 타고 야밤의 질주를 도모한 것이다. 함께한 친구들이 이 장면을 기억에 저장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미겔. 미겔의 이 무심하고도 과감한 행동은 장켈레비치가 &lt;죽음&gt;에서 말한 “살았다는 것의 영원성”을 떠올리게 된다. “잊히고 지워지고 세월의 무게에 뭉개져 미지의 것이 된 이 어렴풋한 실존에는 파괴될 수 없고, 절멸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절대로 이 무언가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장켈레비치,&lt;죽음&gt;,679쪽)</p>
<p> </p>
<p>주인공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룸메이트 미겔의 얼굴이 점점 단순해 진다. 그리고 서서히 뭉개진다. 마침내 백지가 된다. 만화만의 매력이다.</p>
<p> </p>
<p>이 작품은 왓챠에서 애니메이션 &lt;노인들&gt;로도 볼 수 있다.</p>
<p> </p>
<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80/202409/66e4eb9037f5a8604111.jpeg" alt="" /></p>
<p> </p>
<p>“옷차림은 아주 중요해요. 에밀리오. 노인의 옷차림을 보면 제정신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br />
“그렇구려. 호세파 부인처럼 말이오.”</p>
<p> </p>
<p>“전에 말했죠? 여기에선 할 일이 없습니다. 아침 아홉시 식사, 한 시 점심, 일곱 시 저녁 식사. 약 복용량이랑 음식 말고는 중요한 게 없어요.<br />
여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요. 매 끼니 사이에 있는 시간은 빈둥거리며 보냅니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거죠. 다음 끼니 때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p>
<p> </p>
<p>“지붕을 좀 덮자고요. 목이 좀 따끔거려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감기가 들 징조예요.”</p>
<p>“차 지붕을 덮자고요? 뚜껑 열리는 차를 간신히 구했는데, 뚜껑을 덮잔 말이오?”</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at, 14 Sep 2024 11:03: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6"><![CDATA[나이듦을 읽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녹색평론 좌담회]초고령사회,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test.trendcube.co.kr/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202410/66fbef01bdea73408481.jpg" alt="" />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e434922f13a7175042.jpg" alt="" />
<p class="p1">이번에 발간된 녹색평론 187호에는</p>
<p class="p1">나이듦연구소의 소장님으로 데뷔(?!)하신 문탁샘의 좌담회 내용이 실렸습니다.</p>
<p class="p1">사회학자 김찬호선생, 이문재 시인과 함께한 신노년의 이야기입니다.</p>
<strong>초고령사회,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strong>
<p class="p1">베이비부머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두 분과 자칭 K장녀 한 분은</p>
<p class="p1">초고령사회에서 노년의 사회화, 정치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p>
(Featuring 일리치약국, 이어가게)
<p class="p1">아래 링크에서 미리보기가 제공되오니</p>
<p class="p1">함께 읽어봐주세요.</p>
<p class="p1"><a href="http://greenreview.co.kr/greenreview_article/3528/">http://greenreview.co.kr/greenreview_article/3528/</a></p>
전문은 파지사유에 있는 책에서 확인해 주세요~. 사보시면 더욱 좋고요. ^^

<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e4367122caf2979447.jpg" alt="" />
<p class="p3"></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Fri, 13 Sep 2024 21:57: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CDATA[활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인터뷰]나이듦연구소 가을강좌 &lt;불교와 영성&gt; 에 대해 서해가 요요샘에게 묻습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4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e2dd170397b3902364.jpg" alt="" /></p>
<p class="p1"> </p>
<p class="p1">이 인터뷰는 ‘영성’에 대해 궁금하고 관심이 있지만</p>
<p class="p1">뭔가모를 두려움 때문에 선뜻 강좌에 접속하기 망설여지시는 여러분들을 위해 마련했습니다.</p>
<p> </p>
<p class="p1">나이듦연구소의 서해가, 요요샘에게 묻습니다.</p>
<p class="p1">우리는 왜 공부하는 것일까요?</p>
<p class="p1">우리는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p>
<p class="p1">영성은 종교적인 것이기만 할까요?</p>
<p class="p1">우리는 왜 지금 영성을 이야기해야만 할까요?</p>
<p> </p>
<p class="p3">강좌를 준비하신 요요샘으로부터 이 강좌의 기획의도와 강의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씀을 미리 살짝 들어봅니다<span class="s1">.</span></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e2dd1ce4b919638657.jpg" alt="" /></p>
<p> </p>
<p><strong>1.강의 제목이 ‘불교와 영성’인데요. 영성이란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영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저는 영성은 자기를 바꾸기 위한 탐구와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자기를 바꾸기 위한 탐구란 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자기를 비우기 위한 공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를 비운다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나를 비우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수행적 과정이 없는 영성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자기성찰적인 탐구와 수행이 영성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span></p>
<p> </p>
<p><strong>2. 그런데 영성이라고 하면 기독교가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네, 맞아요. 영성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떠올리게 되죠. 기독교에서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20세기 말부터 서구에서 영성을 다르게 생각하는 흐름이 생겨났고, SBNR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Spiritual But Not Religious(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의 약어인데요, 종교적인 신행 생활을 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지로서 영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랍니다. 삶의 비전으로서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종교밖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종교에서 영성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이미 오래전에 등장했고요.</span></p>
<p> </p>
<p><strong>3.개인적으로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제가 문탁에서 공부하기 전에 불교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그때 여러 가지로 마음을 괴롭히는 일들이 많았어요. 기존에 제가 옳다</span><span style="color:#339966;">고 믿었던 앎으로는 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어요. 불교 공부를 통해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고 연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고, 공부와 명상을 통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그런 배움과 경험을 영성이라는 개념과 관련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span><br />
<span style="color:#339966;">제가 영성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건 문탁에서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였어요. 공부가 저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삶을 바꾼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의견 차이나 갈등이 생겨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영성’에 대한 비전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일상의 수행과 마음을 닦는 영성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저야말로 영성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불교 세미나를 만들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고전 공부나 철학, 인류학, 마을 경제 등의 공부에 비해 시작이 늦었지요.</span></p>
<p> </p>
<p><strong>4.나이듦 연구소에서 영성으로 강좌를 여는 이유가 있을까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나이듦 연구소에서는 올해 초에 ‘생태적 죽음’과 관련하여 분해, 먹힘, 시체라는 키워드로 강좌를 열였고, 봄에는 ‘우파니샤드에서 배우는 죽음의 지혜’라는 주제로 강좌를 열었어요. 그 다음 강좌로 ‘나이듦과 영성’이라는 강좌를 기획했어요. 죽음을 주제로 2회의 강좌를 했으니 이제는 ‘나이듦’이라고 생각하고, 나이듦과 영성을 엮어보자고 생각한거죠. 나이듦은 생물학적 노화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늙음, 질병 등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소비주의의 그물에 걸리기 쉬운 액티브 시니어, 젊은 노년, 안티에이징 등과 같은 가치가 아닌 근본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스타일을 발명하려면 나이듦을 어떻게 성찰해야 할까, 라고 질문하면 ‘영성’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아요. 왜 힌두교의 생활주기에서도 자식들 다 키우고 나면 숲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임서기가 그다음 단계인 것처럼요. 나이듦의 키워드로 영성을 탐구해가자는 취지인 것이죠.</span></p>
<p> </p>
<p><strong>5.그런데 불교와 영성으로 영성 탐구를 시작하는 이유도 궁금합니다.</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제가 불교 세미나를 하고 있는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 그리고 공성과 자비야말로 영성적 지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카렌 암스트롱도 축의 시대의 영적 가치의 핵심이 공감과 자비라고 말했는데, 축의 시대의 모든 현자들이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하니까 그 정수가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강조하고 싶은 점은 영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불교는 매우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수행은 빠질 수가 없으니까요.</span></p>
<p> </p>
<p><strong>6.확실히 수행이나 명상에 관심 있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SBNR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영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사회적 현상으로서 영성에 대한 관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보통 영성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확실히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세월호 이후에 ‘사회적 영성’이라는 문제계가 등장했어요.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비극 앞에서 개인적 영성만으로 응답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거지요.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사회적 영성입니다. 영성은 단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는 거지요. 저는 생태 영성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기후위기나 대멸종 같은 사태는 영성을 개인의 수행이나 개인 차원의 구원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영성 자체가 모든 존재의 연결과 상호의존, 관계성을 중시하는 만큼 공동체적 영성이나 생태적 영성은 현실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아요. 영성은 침묵과 고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연결과 관계 속에서 그것을 조망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span></p>
<p> </p>
<p><strong>7.강의에 관심은 있지만 불교도 영성도 문턱이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강좌를 신청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아무 준비 필요 없고요. 그냥 오시면 됩니다. 평소 불교에 대해 궁금했던 게 있으시면 와서 질문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span></p>
<p> </p>
<p><strong>8.세권의 책을 추천하셨는데 세권 중 필독서 한 권만 고른다면?</strong></p>
<p> </p>
<p><span style="color:#339966;">한 권을 고르라면 저는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만, 맘에 드는 책 아무거나 읽으셔도, 읽지 않고 오셔도 괜찮습니다.^^</span></p>
<p> </p>
<p>요요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지금 영성을 탐구해야할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군요. <br />
사회적 영성, SBNR, 영성적 수행, 기후위기 시대에서의 삶, 불교, ... 등에 관심이 있으시다면</p>
<p>부담을 내려놓고 들어와 주세요~</p>
<p> </p>
<p><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a href="https://moontaknet.com/?page_id=14953&amp;uid=42510&amp;mod=document">&lt;불교와 영성&gt; 강좌 소개 보러가기</a></span></p>
<p> </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Thu, 12 Sep 2024 21:39: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0"><![CDATA[강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죽음탐구세미나] 6회후기-700쪽 책이 끝났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44]]></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75/202409/66e2828759fca8528170.png" alt="" width="482" height="271" /></p>
<p>                              &lt;6회차 일요일 아침의 줌 세미나, 700쪽 짜리 책 마지막 세미나&gt;</p>
<p> </p>
<p> 700여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 &lt;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gt;(장켈레비치 지음) 6회차 시간, 이 책의 마지막 세미나 시간이었다. 906 기후 행진에 참여하느라 일요일 오전 10시 줌으로 만난 세미나였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장켈레비치의 철학을 좇아가기가 버거워서 고전했기 때문에 이 책이 끝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춤이 나올 지경이었다.(나만?) 장켈레비치의 논증이 치밀하기도 했지만, 여러 철학자의 사유와 문학 음악 시 등을 관통하는 통찰을 좇아가기가 너무 버거웠던 탓도 있었다.</p>
<p> </p>
<p> 죽음 이편— 죽음 순간의 죽음- 죽음 저편의 죽음 이렇게 3부로 나뉘어진 책에서 마지막 시간에는 죽음 저편의 죽음 마지막 11-12장으로 세미나를 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철학하며 길어올린 사유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라도 생각을 촉발시키는 문장을 중심으로 생각을 나누었다.</p>
<p> </p>
<p> 경호님은" 장켈레비치는 죽음의 사유와 사유하는 존재의 죽음을 대립시켜 얘기하다가 갑자기 '사랑' 이라는 키워드를 출현시킨 이유가 뭘까? '사랑'을 키워드로 삶의 희망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어느 정도 삶에 대한 죽음과의 관계를 결론지어 줬으면 좋겠다. 만약 '열린 결말'이라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닐까?" 라는 질문을 세미나 끝까지 밀고 나왔다. 그 결과 직접 내린 결론도 질문지에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p>
<p> </p>
<ol>
	<li>나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li>
	<li>반면,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li>
	<li>그런데 나의 죽음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불확실하고, 나의 실존은 유일하기 때문에,</li>
	<li>그래서 내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내가 살았다는 사실성은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li>
</ol>
<p> </p>
<p> 거칠기는 하지만 장켈레비치가 반복해서 주장한 바를 담고 있기는 하다. 우리는 경호님의 고민에 공감하면서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리라는 기대를 넘어 살았다는 사실성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p>
<p> </p>
<p> 사유와 관련한 수현님의 질문에서 “인간은 습관을 들이면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유할 수 있습니다.”(P612) 와 관련해서 나눈 의견에서 생각은 결국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측면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평소에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에서 사유하는 습관을 쌓아가면 어느 순간 닥친 고통에서도 그 사유의 습관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측해 보았다, 송지님은 지인 분이 병을 진단받고 수술을 받은 직후 깨어났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 이전에 자신이 사유했던 방식을 복기하며 그 고통을 잊으려 애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p>
<p> </p>
<p> 윤경님은 “삶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덧없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영원한 사실이니까요.”(682)를 바탕으로 살았다는 사실, 흔적 또한 섬광,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우주에 감싸여 어딘가에 떠다닌다는 사실은 멍하니 일상의 연속을 이어오는 모든 이에게 ‘놀람의 능력’으로 다가올 거 같다는 소감을 나누었다.</p>
<p> </p>
<p>  요요님은 "&lt;죽음&gt;이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레지스탕스의 저항에 대한 장켈레비치의 애도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수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들 각각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지만, 그래도 각자 자신의 시대와 삶의 조건 속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p>
<p> </p>
<p>  11부 9절 &lt;윤회도 범생명론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gt; 에서는 “개체를 상호교환 가능하다고 여기는 ”범생명론“은 ‘대체 불가능’을 가볍게 여깁니다.” 라는 장켈레비치의 입장, 실존주의자로써 대체불가능한 개인을 강조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요님은 질문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소위 '생태파시즘'과 같은 것과도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뭐든 좋다는 전체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 말입니다. 만일 장켈레비치가 '범생명론'으로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납득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과 개체의 대체 불가능성이 항상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 둘이 장켈레비치가 지적하는 것처럼 언제나 양자택일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고 문제 제기를 했다.</p>
<p> </p>
<p>  이와 관련 이 시대가 모든 생명이 멸종으로 향하는 형국에, 인간 개인의 대체 불가능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의미였다. 더구나 나의 죽음과 제 3의 죽음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우리 시대의 ‘죽음’의 화두와 연결시키는 것을 통해 장켈레비치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독해하는 것까지가 중요하다는 정리까지 나아갔다.</p>
<p> </p>
<p>  12부는 결말로 &lt;&lt;사실성은 소멸될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gt;&gt;에서는 모든 것이 무화되더라도 살았다는 사실은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논증을 거쳐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세미나 내내 힘들게 읽은 책이라...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12부의 일부 문장들은 죽음을 사유하는 깊이를 찐하게 전해주는 효과는 분명 있었다. 그 문장 일부를 옮겨 적는 것으로 6회차 후기를 끝맺고자 한다.</p>
<p> </p>
<p style="padding-left:40px;">죽음의 회고적인 신비로운 메시지는 판에 박힌 일상을 무한히 넘어서는 무언가에 대한 하나의 암시입니다. 죽음이 단지 완결되어 버린 한 생애의 역사적 의미를 끌어내고 봉인할 뿐만 아니라, 가장 자각이 없는 사람들마저 삶의 깊은 낯섦과 덧없음을 자각하도록 돕는 것이죠. (.....)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서 일상의 연속이라는 요람 속에 멍하니 잠들어 있던 놀람의 능력을 갑자기 깨웁니다. 이 연속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죽음은 우리의 연속주의적인 마비상태를 뒤흔들어 놓습니다.(675쪽)</p>
<p style="padding-left:40px;"> </p>
<p>다음 세미나는 9월 21일 토요일 오후 3시,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본 내용들을 중심으로 미니에세이를 써서 함께 발표합니다. 각자 간식 조금씩 챙겨오시고요, 세미나 끝나고 두꺼운 책 끝낸 책거리 뒷풀이도 있습니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기린]]></author>
			<pubDate>Thu, 12 Sep 2024 14:59: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2"><![CDATA[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북드라망 이사 집들이 다녀왔습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content_redirect=15]]></link>
			<description><![CDATA[9월 11일 수요일 북드라망출판사가 이사를 해서 집들이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수요일 오전에 시간을 내어 기린과 서해가 공동체 대표로 경복궁역에 있는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으로요.

인문약방의 선물 쌍화탕 20개와 생맥산 20개

달밤더치의 선물 더치 커피 2병

모두 물이라....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승용차로 다녀왔습니다.

명절대목이라 가는 길을 가리키는 네비의 주행노선 색깔이 대부분 빨간색.... 막혔다는 얘기죠.

문 앞에 붙여진 집들이 알리는 간판

<img class="aligncenter"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e2555c74b981877076.jpg" alt="" width="369" height="462" />

들어가니 강학원 팀은 이미 다녀가고 사이재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축하하러 와 있었습니다.

손님들을 위한 맛있는 음식, 먼저 다녀간 분들의 사진도 있네요. 공간을 설명하고 있는 분이 김현경 북드라망 대표님요.

사실 집들이 가서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니 회가 동하여.... 사진 찍는 것도 까먹고 음식에 집중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들은..... 다른 분들이 SNS에 올린 것을 퍼왔습니다;;;

앞으로 번창하시라고 덕담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길도 막히고 해서 저희는 서둘러 나왔습니다.

그후로도 다른 분들도 집들이 축하하러 오셨겠지요^^

<img class="alignleft"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e255c283f113727895.jpg" alt="" width="266" height="338" /><img src="https://moontaknet.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61/202409/66e255eb9ac051585022.jpg" alt="" width="269" height="341" />
<p style="text-align:left;">북드라망에서 준비해주신 다양한 간식이 담긴 선물도 받아 공간으로 다시 돌아오는 정체를 잊는데 요긴하게 쓰면서 돌아왔습니다~~</p>
올해 출판계의 유례없는 불황 속에서도 간간이 보이는 불빛을 따라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나이듦]]></author>
			<pubDate>Thu, 12 Sep 2024 11:55: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trendcube.co.kr/?kboard_redirect=1"><![CDATA[활동]]></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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